그리스도의 복음과 진리를 전하는전도 문서 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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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도해야 하는가? 전도하지 않는 것은 죄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16).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성도가 전도하지 않는 것은 죄다.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가 멸망의 지옥을 외치며 경고하지 않는다면 이는 분명 문제가 있다. 이것을 어찌 죄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인간의 상상과 경험을 초월하는 너무도 끔찍한 멸망의 지옥에서 건져졌으면서, 그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 불쌍한 자들을 어찌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 우리에게 그 길을 가르쳐주지 않고 방관하고 있었다면 우리가 그 멸망의 지옥 형벌에서 구원받았겠는가? 우리가 구원받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기도와 전도와 물질적 헌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 열매로 구원받은 우리가 이제 그 전도의 길을 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구원받던 때를 회상하여 보라. 얼마나 놀라웠던가! 또 얼마나 감격스러우며 기뻤던가! 이제 이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데 우리가 쓰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구원의 길을 깨닫지 못하고 방황하던 때의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불쌍했던가? 그때 우리는 절망 중에 죽음을 생각하기도 하였다. 세상 모든 일이 뒤 틀려 보이고, 정의와 진리가 다 사라져버린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하였다. 형제여, 그런 사람은 지금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 사람을 구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지금도 슬프고 애타는 눈망울로 누군가가 구해주기를 기다리는 길 잃은 양 떼들을 형제는 외면할 것인가? 정녕 외면할 것인가? 도대체 사람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져내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것은 영원에 관한 일인데 순간 있다가 사라지는 세상의 어떤 일이 이보다 더 중요할 수 있겠는가? 성도가 전도하지 않은 것이 죄인 까닭은 첫째로, 사람의 영혼을 지옥으로 가도록 버려두는 일이요, 폭력은 몸만 해치는 죄가 되지만 전도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몸과 영혼을 지옥에 밀어 넣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단코 문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가 무관심하고 졸며 세상에 취해있는 동안 우리를 원망하면서 슬픈 비명을 지르며 지옥으로 빠져들어 가는 영혼들의 절규를 우리는 왜 듣지 못하는가? 이제 우리의 길은 분명하지 않는가? 우리의 가치관은 분명해지지 않았는가? 이제 돈을 벌어도 복음을 위하여 벌어야 한다. 직장에 다니는 것도 복음을 위하여 다니는 것이다. 공부하거나 가사노동을 하거나 무엇을 하든지 내가 오늘 숨 쉬고 있는 것은 오직 복음을 위하여 있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수고가, 우리의 헌신이, 우리의 눈물과 기도와 전도가 지옥에서 한 영혼만 건진다고 하여도 이는 참으로 위대한 일이요, 가치 있는 일이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16). 우리가 바울의 이 심정을 이해하고 동참할 수만 있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열매가 주님으로부터 있을 것이다. 둘째로, 전도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고백한 믿음을 우리 스스로가 지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14장 23절 후반에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믿음이 동기가 되지 아니한 행동은 죄라고 정의하고 있다. 필자는 어느 집회에 참석하여 성도들에게 질문하였다. “여러분, 지옥을 믿습니까?” 모두가 “예” 하고 답변하였다. 필자는 즉시 외쳤다. “그런데 왜 전도하지 않습니까?” 지옥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전도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맞지 않는 행동인가? 영영 꺼지지 않는 불못에서 고통 중에 뛰고 있을 불쌍한 영혼과 육신들이 고통당하는 지옥을 믿는다면서 전도하지 않거나, 전도를 위해 투자하지 않는다면, 또는 투자한다고 하여도 인색하다면 이는 실로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결론은 분명해졌다. 우리는 지옥을 믿는다고 말하지 말든지, 아니면 주님 앞에 통회하고 복음을 위하여 살든지 선택해야 한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7절에서 외치고 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오로지 복음만을 위하여 한평생 살다간 바울이 오늘 우리 앞에 나타난다 해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라”는 말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엄히 명하노니 말씀을 전파하라.” 형제여,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짧게 살다갈 허무한 인생을 영원을 위하여 투자하지 않겠는가? 이 길보다 더 가치 있고 위대한 길이 없기에 권하는 말이다. 주님의 명령이요 유언이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6). 인생이 70, 혹은 80년을 살다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같이 하찮은 모습으로 가면서 한 마디 유언을 남길지라도 사람들은 멸시하지 않는다. 하물며 천지의 주재요 창조주이시면서 자신을 낮추사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 예수님의 유언에 대해 우리가 무시하거나 무관심하다면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은 승천 직전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 곧 유언의 말씀이다. 통상적으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바로는 사람이 죽음 직전에 하는 유언은 중요한 말을 하게 된다. 주님께서 승천 직전에 하신 이 유언의 말씀도 너무나 중요한 말씀인 것이다. 이 말씀 속에는 주님의 전 생애가 함축되어 있다. 주님은 왜 세상에 오셨는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딤전 1:15). 그렇다. 주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세상에 오실 이유도 없고, 오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멸망의 지옥을 향하여 달려가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셨다면 주님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음이 분명하다. 주님의 공생애를 보라. 온갖 죄와 질병과 고통에 사로잡힌 죄인을 그 모든 고통에서 해방해 주시기 위하여 쉴 겨를도 없이 분주하셨던 주님이 아니신가! 우물가에 나오는 일이 고통스러웠던 불쌍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지 않고는 그냥 지나칠 수 없으셨던,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으셨던 동정 많은 주님이 아니셨던가! 그 여인은 자신의 죄로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절망 가운데서 있었으나 주님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되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막 1:38). 이 얼마나 주님의 삶을 잘 표현한 말씀인가! 주님은 전도하기 위하여 오셨고 사셨고, 전도하기 위하여 죽으셨고 부활하셨다. 성령님을 보내신 목적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함이다. 주님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보자.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는데 여기에 전도에 대한 목적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라”(막 3:14).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 승천 후 한결같이 전도자들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하여 전 생애를 바쳤으며 복음을 위하여 대부분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원받은 성도가 복음을 위하여 산다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을까? 이보다 더 가치 있고 바람직한 일이 있을까? 이 길은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길이며 제자들이 따라갔던 길이며, 수많은 믿음의 선진이 걸어갔던 길이다. 교회사 2,000여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주의 종들이 피 흘려 복음을 전했는가! 그들의 희생과 그들의 고생과 눈물, 그들이 흘린 핏값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복음이 전해졌거늘 어떤 성도라 일컫는 자들은 우연히 받은 구원처럼 값없고 가치 없는 일에 시간과 물질을 소모하는 예를 볼 때 슬픔을 금할 수 없다. 이런 일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요, 사단을 도와주는 일이다. 이런 일들은 주님의 일에 동역한 것이 아닌 사단의 일에 동역한 셈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일이다. 성도가 사단에게 속아 분별이 없을 때 이런 일이 가능하다. 주님은 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던가? 너무도 잘 아는 사실이나 성도들이 쉽게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 53:5). 복음 전도를 위하여 주님처럼 죽는 데까지는 못 가도 헌신과 수고를 망설여서야 하겠는가? 주님의 죽음의 뜻을 새기자. 묵상하자. 그리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자. 전도, 오직 주님은 전도를 위하여 죽으셨다. 주님은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셨다(롬 5:8). 또한, 죄인의 구원받을 길을 활짝 열어놓으셨다(히 10:20). 주님은 죽음으로서 전도하셨다. 주님보다 더 위대한 전도자는 없다. 결코, 없다. 주님은 전도자의 생애를 보여주시고 전도를 가르치셨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전도하셨다. 그 순간은 손에 못이 박힌 상태이며, 발에 못이 박힌 상태였다. 머리는 가시가 찔러서 온몸이 아프고 저리는 고통 중에 있었다. 목은 타들어 가고 땀과 피가 범벅이 되어 눈뜨기조차 힘들었을 고통 중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아픈 것에 있지 않았다. 잠시 후 생명이 끝나면 즉시 불속에 들어갈 두 강도를 생각하며 가슴 아파 하시던 주님의 모습은 우리 눈에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그 주님은 끝내 한 강도를 회개시켜 구원하셨다. 얼마나 놀라우신가! 우리 주님은 얼마나 경외할 만한가! 부활 후 주님은 양떼들을 제자들에게 부탁하시는 유언을 남기시고 승천하셨다. 이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지금도 성도가 복음을 위하여 살면 기뻐하시고 육신을 위하여 살면 슬퍼하시며 안타까워하신다(막 16:19). 바울은 이 주님을 깨닫고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전 생애를 드렸으며, 모든 제자와 선진도 그러하였다. 주님의 유언이요 명령인 전도는 이 세대의 우리의 책임이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 믿음의 선진들은 전도자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이시다(요 1:1).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쓰였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성경을 사용하시며 인간을 사용하고 계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사람을 통해 쓰셨고 사람에 의해서 사람에게 전파되었다. 여기에 전도의 중요성이 있다. 성경은 전도자의 중요성에 대해서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증거하고 있다(롬 10:15).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듣겠는가?”(롬 10:14).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에게 전도해 주신 분들이 자기만 생각하여 편함과 안일을 좇고 육신의 정욕만 좇아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겠는가? 성경에 나타난 선진들은 그칠 줄 모르고 전도하였던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하셨다. 그 후 돕는 배필 하와에게 아담은 전도했다. 하와는 그 말을 잘 새겨들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결국, 그는 사는 길과 죽는 길에서 죽는 길을 택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최초의 전도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타락한 인류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였던 노아를 성경은 평가하기를 “의를 전하는 노아와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벧후 2:5)라고 기록하고 있다. 노아는 훌륭한 전도자였다. 그는 동조자도 별로 없는 막막한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을 믿고 끝까지 의를 전파하는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 계획을 말씀하셨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에 인도하기 위하여 많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 주님의 학교에서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연단 받아 그 일을 수행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완악하여 그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으나 그는 끝까지 그 일을 계속했다. 성경은 모세에 대하여 말하기를 “믿음으로 모세는…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오, 형제여, 당신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한다면 무엇이라고 기록되겠는지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모세는 복음을 위하여 부귀와 영화와 권세를 다 포기한 훌륭한 전도자였다. 타락해 가는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부르셨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 이 목소리가 처량하게 들리지 않는가? 사랑하는 딸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러 가야 할 전도자가 필요한데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으니 주님의 마음이 어떠하셨겠는가? 주님의 이 음성을 당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도 듣지 못했으나 오직 이사야는 들었다. 그리고 대답하기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 시대의 구원받은 성도들은 “추수할 곡식은 많되 일꾼은 적다”고 탄식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필자는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이사야의 귀를 주셔서 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지금은 망설일 때가 아니다. 이것저것 계산할 때가 아니다. 우리가 망설이며 계산하며 육신의 삶을 살며 시간을 소비하는 이 순간에도 사람은 끝없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다. 오, 주여. 이 시대에도 이사야 같은 종들을 일으켜 주시옵소서. 아멘. 주님은 또한 예레미야를 부르셨다(렘 1:5). 예레미야는 대답하기를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였다. 이 겸손한 사람 예레미야를 하나님은 사용하셨다. 물론 망해 가는 나라에서 의롭게 살아간 고난의 전도자요 선지자였으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전도자의 길을 가므로 그의 생애는 오늘날까지, 그리고 영원히 빛나는 것이다. 훗날 영원의 세계, 곧 아버지의 나라에서 우리 모두 예레미야를 만날 때에 기쁨이 있으리라. 하나님이 에스겔을 부르신 때는 여호야긴 왕은 포로로 잡혀가고 유다는 시드기야가 다스리고 있던 때였다. 유다는 강퍅하여 하나님을 거역하여 망하기 직전에 와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큰 것이어서 에스겔을 보내신 것이다. 에스겔은 힘을 다하여 이스라엘의 심판과 회복과 위로를 전하며 그의 생애를 보냈다. 그 외에도 다니엘, 호세아, 요엘, 요나 등 수많은 주님의 종들이 전도자의 길을 힘을 다하여 수행하여 지금 하늘에서 자기들의 복을 누리고 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베드로를 부르셨다. 그리고 즉시 그를 부르신 목적을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주님은 즉시 순종하는 베드로를 연단하셔서 큰 전도자로 쓰셨다. 이때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랐던 베드로는 후에 회고하기를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다(벧후 1:1). 베드로의 선택은 옳았다. 그는 베드로후서를 마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있음을 본다. 주님의 제자들과 수를 알 수 없는 선진들이 복음 때문에 살고 복음 때문에 죽어갔다. 그들은 주님께 부름을 받고 주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태양처럼 뜨겁게 살다 갔다. 자기 몸을 불태우는 태양처럼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자신의 삶이 없을 뿐 아니라 땅에서는 나그네와 행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살다 갔다. 오, 형제여, 복음을 위한 삶, 전도자의 길,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계시록에 나오는 촛대처럼 당신의 인생을 녹여 태우므로 복음의 횃불을 밝히고 싶지 않은가? 하나님은 당신의 입이 필요하다. 당신의 손이 필요하다. 당신의 시간, 물질이 복음전파를 위해서 필요하다. 구원받은 성도는 누구나 전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도가 아니면 우리가 이 땅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한 영혼의 가치는 크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 :10). 만약 당신이 5,000만원의 돈을 어떤 사람에게 떼였다고 생각하여 보자. 자취를 감춘 그 사람을 찾을 길이 없어 애가 타고 있었다. 수소문하고 알아본 결과 그는 강원도 산간 어디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그는 그곳에 숨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 정보를 입수한 당신은 그곳을 즉시 찾아갈 것이다. 아무리 바쁘고 중요한 일이 있어도 그를 먼저 찾아 나설 것이다. 아마 사람들 대부분은 필자의 이 말에 동의할 줄 믿는다. 당신에게 있어 5,000만원의 돈이 그토록 중요하여 만사를 제쳐두고 찾아 나선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하늘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한 영혼을 찾아 이 세상에 오셨다면 그 한 영혼은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것은 한 영혼의 가치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도 천하만국의 부귀영화와 좋은 것을 다 뿌리치시고 한 영혼을 건지는 일에만 몰두하셨다(마 4:1-11). 억지로 왕 삼고자 할 때에도 거절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6:15). 한 영혼을 건지기 위함이 아닌가? 당신이 5,000만원 때문에 직장을 휴직하고 찾아 나선다면, 왕의 자리를 버리고 당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 영혼의 가치는 어떤 직책이나 어떤 물질의 가치와도 비교할 수 없다. 실제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하셨다(마 16:26). 주님은 이 지구를 회복시켜 살기 좋은 낙원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 세상의 제도를 바꾸거나 나라를 개혁시켜 발전시키기 위하여 오신 것도 아니다. 오직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는 영혼, 즉 물질적 가치를 온전히 초월한 영혼의 가치 때문이다. 바울은 구속의 진리를 상업적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6:20, 7:23).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이 값을 치르시고 사셨다. 모든 물건의 가치는 값으로 정해진다. 500원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은 500원의 가치를 지닌다. 그 값이 정상적이라면 그 가치는 그 이상을 결코 넘지 못한다. 물건 중에는 5,000만원, 또는 50억을 주어야 하는 것도 많다. 그 가격은 그 물건의 가치이다. 그렇다면 한 영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치르신 대가는 무엇인가? 그것은 물질로써 대체될 수 없는 것이었다(시 49:7-8). 이 일을 생각할 때 다음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한 영혼을 건지기 위하여 치르신 값은 자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비참하게 죽게 하신 것이었다. 독자도 생각해보시라. 우리가 그만한 대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초라하고 하루살이 같은 가치 없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한 영혼의 가치를 자신의 외아들을 희생시킬 만큼 크게 보셨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말씀 안에서 생각해보자. 첫째, 한 영혼을 귀히 보시고 아들을 주신 까닭은, 그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투자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평생 모은 재산 중 절반을 어느 학교 재단에 기부하였다고 하자. 여러분이 그 학교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아니하겠는가? 그 학교가 잘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몸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만드심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한다. 하나님의 생기가 인간에게 불어 넣어져서 인간이 만들어졌으니 물질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동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람은 존귀하다. 그러나 존귀한 가치를 깨달을 때 존귀한 것이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둘째, 영혼의 가치를 존귀하게 보시고 아들을 주신 까닭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이다. 아비가 자식을 귀하게 여기듯 하나님이 한 영혼을 귀히 보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3). 부모가 자식을 잊지 못하고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어떠하시겠는가(사 49:15). 창세 이래로 하나님은 사람을 귀히 보셨고 사랑하셨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까닭이다. 셋째, 한 영혼을 귀히 보시고 아들을 주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불신 영혼이 가는 지옥이 너무도 끔찍한 까닭이다. 말이야 쉽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속에서 영원히 죽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보통 생각할 문제인가? 독자들은 이 글을 읽는 순간 놀라야 한다. 심장이 뛰어야 하고 충격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실체이다. 정직한 반응이다. 만약 당신의 아들이 범죄하여 사형선고를 받게 될 상황이라면 당신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리려고 노력할 것이다. 몸부림을 칠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살릴 방법을 찾으려 할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을 닮은 존귀한 인간이 멸망의 지옥에 영원히 던져지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는가! 얼마나 고통스러우시겠는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선뜻 내어주실 수밖에 없었음이 당연하지 않은가! 한 영혼을 위하여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구원하셨지 않은가! 이러한 사랑을 받은 우리가 죽음을 각오하고 전도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도가 전도하는 것은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고 상 받을 만한 일도 아니고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내가 받은 사랑을 나누는 일이요,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일인 것이다. 주님이 벌레 같은 나의 영혼의 가치를 이토록 크게 보아주셨다면 내가 다른 영혼의 가치를 무시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전도하지 않는다면 한 영혼의 가치의 귀중함을 잊어버렸거나 무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선진들의 헌신적인 삶은 한 영혼의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였다. 독자여, 당신의 영혼이 가치를 깨달은 다른 전도자에 의해서 건져진 것과 같이, 당신도 다른 영혼의 구원을 위한 해산의 수고를 시작하지 않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일은 전도하는 일이다. 지옥 가는 사람을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 필자는 수없이 많은 날 동안 지옥 문제를 생각해오고 있는바, 어떤 경우를 말하더라도 사람이 지옥 가는 일을 막지 않을 수 없다. 지옥을 증거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 단순히 기독교 종교를 확장하는 일일 수는 없다. 이것은 생명의 생(生)과 사(死)의 문제요 인간의 지능으로 상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지옥의 고통을 면하게 하는 일인 것이다. 필자는 사석에서 가끔 여담으로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만약 대통령과 독대할 기회가 있다면,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밖에 없다. 어서 ‘지옥을 면하시오’ 하는 말이다. 이 말 이외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세상의 어떤 일이 지옥을 피하는 일보다 중하겠는가?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핑계가 있다. 그들은 그 핑계로 믿지 않는 자신을 정당화시키려 한다. 우리는 전도 전략상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때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말하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기에는 너무 급하다. 그들의 심장은 계속 뛰고 있으며 그들의 육체는 종점을 향하여 힘차게 달음질하고 있다. 그리고 그 종점에는 끔찍한 지옥이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하고 달음질하고 있다. 그들의 생명은 존귀하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시간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을 모두 낭비하고 있다. 시간과 기회의 중요성은 지옥에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의 눈물은 후회와 통곡의 부산물일 것이다. 건강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은 죄악을 행하는데, 쾌락을 즐기는데 그들의 건강을 소모하고 있다.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듣는 것을 귀찮게 여기고 있다. 그들은 불쌍한 운명에 처해 있다. 그들은 그들의 지식과 능력과 시간 등, 모든 중요한 것을 다 낭비하고 지옥에서 울게 될 것이다. 그들을 이대로 내버려 두기에는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다. 삶은 그들의 것이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삶을 사단에 종노릇하며 탕진하여 결국 자기 영혼을 망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 일에 대해서 간증하면서 고통스러운 심령을 털어놓고 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롬 9:2). 바울은 천국의 아름다움과 지옥의 끔찍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눈을 감으면 자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지옥에서 고통을 호소하며 울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한, 눈을 뜨면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람이 지옥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현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와 같은 사실 앞에서 그의 심장은 터질 듯 끓고 있었으며 그의 눈은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고통과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오직 생각나는 것은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불쌍함뿐이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근심이었다. 사도 바울의 그치지 않는 고통이었다. 이 양심적인 고통이 사도 바울을 늘 짓눌렀다. 그는 이 거룩한 고통으로 인하여 평생을 복음을 전했다. 미친 듯이 복음을 전했다. 그는 지옥의 적나라한 모습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자로서 사람들에게 지옥을 경고하는 일 외에 아무것도 중요한 일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면 그는 어디든지 갈 수 있었고 또한 갔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면 무슨 회생이든 머뭇거리지 않았다. 마치 불난 집에서 미처 나오지 못한 자식을 살리기 위해 실성한 사람처럼 불속으로 뛰어들되 위험을 전혀 생각지 않고 뛰어드는 어미와 같았다. 오로지 아기를 살리려는 생각 외에 아무 생각도 없는 어미처럼…. 이것이 바울의 생애였다. 다음 말씀이 바울의 심령을 더 잘 증거한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롬 9:3). 바울의 골육 친척들이 유대교를 고집하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못박은 유대인들처럼 여전히 이단 취급하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의 당할 지옥 형벌의 끔찍함을 알기에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의 구원을 원했다. 보통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간증이 아닌가? 전도자로서의 바울은 이토록 처절하였다. 그는 평생을 육신으로 당하는 고통과 양심적인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금일의 수많은 기독인이 바울을 사랑하고 존경한다고는 하나 바울의 이 심령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필자는 한탄하는 마음이 있다. 예수님의 고통은 어떠하셨겠는가? “이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 16: 21).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하는 말씀으로 주님은 필연적인 것을 말씀하셨다. 이 일은 꼭 이루어져야만 했으며 예수님은 이 길을 꼭 통과하여야만 하셨다. 왜냐하면, 이것이 사람을 지옥에서 건지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를 흔드는 놀라운 진리를 알 리가 없는 제자 베드로는 “그리 마옵소서” 하고 말리지 않았던가! 그 결과 그는 “사단아” 하는 책망을 듣고 말았다. 베드로의 생애에 가장 수치스러웠던 순간 중 하나였을 것이다. 영적인 의미를 깊이 깨닫지 못하고 육신으로 말하는 베드로의 행동은 사단의 생각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오, 성도들이여,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옥 가는 영혼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예수님의 생애가 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 바울의 삶이 증명하고 있다. 필리핀, 캄보디아, 태국에서 독충과 싸우며, 고독을 극복하며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증인이다.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람을 지옥에 가도록 그대로 버려둘 수는 없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삶이 복음을 위한 고난으로 바뀌기 바란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기 바란다. 이 일이 우리가 호흡하는 유일한 이유이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
서평 |
복음은 영원히 바뀔 수 없다. 바뀌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그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시대와 장소와 대상에 따라서 바뀌어야 한다. 서양에서 들어온 복음이지만 전도하는 방법까지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된다고 보되, 한국의 실정에 맞는 다양한 방법들이 연구되어야 한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생각, 문화 수준, 가치관 등 많은 부분에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 60억의 인구가 있다면 구도자의 상태 또한 60억 가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다양한 이들에게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이것이 전도자들의 과제이다. 세상에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상품 하나를 팔기 위해 온갖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고 노력한다. 그들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영생을 전하는 우리랴! 이 책이 영혼의 가치를 아는 투자자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끝으로, 부족한 소제의 글을 이렇게 책으로 만들어 많은 전도자에게 도움을 주신 전도출판사에 감사드린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책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고 열매를 거두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
목차 |
서문……………………………………………………………………8 왜 전도해야 하는가?………………………………………………9 전도하지 않는 것은 죄다 / 9 주님의 명령이요 유언이다 / 12 믿음의 선진들은 전도자였다 / 15 한 영혼의 가치는 크다 / 19 지옥 가는 영혼을 내버려둘 수는 없다 / 22 전도란 무엇인가?…………………………………………………27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 27 증인이 되는 것이다 / 29 영적인 전쟁이다 / 32 씨를 뿌리는 일이다 / 36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다 / 40 경고의 나팔을 부는 것이다 / 44 귀신을 내쫓는 것이다 / 47 인생 최고의 사업이다 / 50 전도자의 자세와 인격………………………………………………55 능력 있는 전도자 / 55 부지런한 전도자 / 58 확신 있는 전도자 / 61 충성스러운 전도자 / 65 훈련된 전도자 / 68 연구하는 전도자 / 72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 접근………………………………………76 접근 단계 / 76 단계적인 접근 / 79 접근의 방해물들 / 86 접근에 관한 또 다른 조언들 / 90 접근의 결론 / 94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 진단…………………………………… 99 초기 진단 / 99 어떻게 진단할 것인가? / 102 그가 처한 상황을 진단하라 / 106 영혼의 상태를 진단하라 / 109 질문이나 답변 속에 감추인 의도를 진단하라 / 113 진단을 위한 기도와 노력 / 116 구도자를 진단하라 / 120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 전투 ……………………………………124 전투단계 / 124 전도전략 / 128 개인적인 전도전략 / 133 교회적인 전도전략 / 136 소명의식의 결여 / 140 헌신의 결여 / 145 헌신된 전도 / 151 사랑의 결여 / 155 건강한 교회의 전도 / 159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 파괴……………………………………165 파괴단계 / 165 무엇을 파괴할 것인가? / 170 정곡을 찾아라 / 175 정곡을 찾는데 무관심한 이유 / 180 낙심하지 말라 / 186 어떻게 증거할 것인가?…………………………………………193 주님의 권위로 굴복시켜라 / 193 끌려다니지 말라 / 203 은혜로 녹여라 / 209 구도자를 감동시켜라 / 215 말싸움에서 지지 말라 / 221 놀라게 하라 / 228 의심을 풀어주라 / 235 논리로 이해시켜라 / 242 생각하게 하라 / 249 무엇을 증거할 것인가?…………………………………………… 256 지옥을 전하라 / 256 죄와 그 결국을 전하라 / 261 심판의 하나님을 알게 하라 / 268 성경의 역사성을 전하라 / 275 천국을 전하라 / 282 말씀의 능력을 전하라 / 289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라 / 296 |
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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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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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왜 전도해야 하는가? 전도하지 않는 것은 죄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16).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성도가 전도하지 않는 것은 죄다.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가 멸망의 지옥을 외치며 경고하지 않는다면 이는 분명 문제가 있다. 이것을 어찌 죄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인간의 상상과 경험을 초월하는 너무도 끔찍한 멸망의 지옥에서 건져졌으면서, 그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 불쌍한 자들을 어찌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 우리에게 그 길을 가르쳐주지 않고 방관하고 있었다면 우리가 그 멸망의 지옥 형벌에서 구원받았겠는가? 우리가 구원받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기도와 전도와 물질적 헌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 열매로 구원받은 우리가 이제 그 전도의 길을 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구원받던 때를 회상하여 보라. 얼마나 놀라웠던가! 또 얼마나 감격스러우며 기뻤던가! 이제 이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데 우리가 쓰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구원의 길을 깨닫지 못하고 방황하던 때의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불쌍했던가? 그때 우리는 절망 중에 죽음을 생각하기도 하였다. 세상 모든 일이 뒤 틀려 보이고, 정의와 진리가 다 사라져버린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하였다. 형제여, 그런 사람은 지금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 사람을 구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지금도 슬프고 애타는 눈망울로 누군가가 구해주기를 기다리는 길 잃은 양 떼들을 형제는 외면할 것인가? 정녕 외면할 것인가? 도대체 사람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져내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것은 영원에 관한 일인데 순간 있다가 사라지는 세상의 어떤 일이 이보다 더 중요할 수 있겠는가? 성도가 전도하지 않은 것이 죄인 까닭은 첫째로, 사람의 영혼을 지옥으로 가도록 버려두는 일이요, 폭력은 몸만 해치는 죄가 되지만 전도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몸과 영혼을 지옥에 밀어 넣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단코 문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가 무관심하고 졸며 세상에 취해있는 동안 우리를 원망하면서 슬픈 비명을 지르며 지옥으로 빠져들어 가는 영혼들의 절규를 우리는 왜 듣지 못하는가? 이제 우리의 길은 분명하지 않는가? 우리의 가치관은 분명해지지 않았는가? 이제 돈을 벌어도 복음을 위하여 벌어야 한다. 직장에 다니는 것도 복음을 위하여 다니는 것이다. 공부하거나 가사노동을 하거나 무엇을 하든지 내가 오늘 숨 쉬고 있는 것은 오직 복음을 위하여 있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수고가, 우리의 헌신이, 우리의 눈물과 기도와 전도가 지옥에서 한 영혼만 건진다고 하여도 이는 참으로 위대한 일이요, 가치 있는 일이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16). 우리가 바울의 이 심정을 이해하고 동참할 수만 있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열매가 주님으로부터 있을 것이다. 둘째로, 전도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고백한 믿음을 우리 스스로가 지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14장 23절 후반에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믿음이 동기가 되지 아니한 행동은 죄라고 정의하고 있다. 필자는 어느 집회에 참석하여 성도들에게 질문하였다. “여러분, 지옥을 믿습니까?” 모두가 “예” 하고 답변하였다. 필자는 즉시 외쳤다. “그런데 왜 전도하지 않습니까?” 지옥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전도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맞지 않는 행동인가? 영영 꺼지지 않는 불못에서 고통 중에 뛰고 있을 불쌍한 영혼과 육신들이 고통당하는 지옥을 믿는다면서 전도하지 않거나, 전도를 위해 투자하지 않는다면, 또는 투자한다고 하여도 인색하다면 이는 실로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결론은 분명해졌다. 우리는 지옥을 믿는다고 말하지 말든지, 아니면 주님 앞에 통회하고 복음을 위하여 살든지 선택해야 한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7절에서 외치고 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오로지 복음만을 위하여 한평생 살다간 바울이 오늘 우리 앞에 나타난다 해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라”는 말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엄히 명하노니 말씀을 전파하라.” 형제여,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짧게 살다갈 허무한 인생을 영원을 위하여 투자하지 않겠는가? 이 길보다 더 가치 있고 위대한 길이 없기에 권하는 말이다. 주님의 명령이요 유언이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6). 인생이 70, 혹은 80년을 살다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같이 하찮은 모습으로 가면서 한 마디 유언을 남길지라도 사람들은 멸시하지 않는다. 하물며 천지의 주재요 창조주이시면서 자신을 낮추사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 예수님의 유언에 대해 우리가 무시하거나 무관심하다면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은 승천 직전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 곧 유언의 말씀이다. 통상적으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바로는 사람이 죽음 직전에 하는 유언은 중요한 말을 하게 된다. 주님께서 승천 직전에 하신 이 유언의 말씀도 너무나 중요한 말씀인 것이다. 이 말씀 속에는 주님의 전 생애가 함축되어 있다. 주님은 왜 세상에 오셨는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딤전 1:15). 그렇다. 주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세상에 오실 이유도 없고, 오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멸망의 지옥을 향하여 달려가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셨다면 주님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음이 분명하다. 주님의 공생애를 보라. 온갖 죄와 질병과 고통에 사로잡힌 죄인을 그 모든 고통에서 해방해 주시기 위하여 쉴 겨를도 없이 분주하셨던 주님이 아니신가! 우물가에 나오는 일이 고통스러웠던 불쌍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지 않고는 그냥 지나칠 수 없으셨던,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으셨던 동정 많은 주님이 아니셨던가! 그 여인은 자신의 죄로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절망 가운데서 있었으나 주님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되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막 1:38). 이 얼마나 주님의 삶을 잘 표현한 말씀인가! 주님은 전도하기 위하여 오셨고 사셨고, 전도하기 위하여 죽으셨고 부활하셨다. 성령님을 보내신 목적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함이다. 주님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보자.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는데 여기에 전도에 대한 목적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라”(막 3:14).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 승천 후 한결같이 전도자들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하여 전 생애를 바쳤으며 복음을 위하여 대부분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원받은 성도가 복음을 위하여 산다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을까? 이보다 더 가치 있고 바람직한 일이 있을까? 이 길은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길이며 제자들이 따라갔던 길이며, 수많은 믿음의 선진이 걸어갔던 길이다. 교회사 2,000여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주의 종들이 피 흘려 복음을 전했는가! 그들의 희생과 그들의 고생과 눈물, 그들이 흘린 핏값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복음이 전해졌거늘 어떤 성도라 일컫는 자들은 우연히 받은 구원처럼 값없고 가치 없는 일에 시간과 물질을 소모하는 예를 볼 때 슬픔을 금할 수 없다. 이런 일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요, 사단을 도와주는 일이다. 이런 일들은 주님의 일에 동역한 것이 아닌 사단의 일에 동역한 셈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일이다. 성도가 사단에게 속아 분별이 없을 때 이런 일이 가능하다. 주님은 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던가? 너무도 잘 아는 사실이나 성도들이 쉽게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 53:5). 복음 전도를 위하여 주님처럼 죽는 데까지는 못 가도 헌신과 수고를 망설여서야 하겠는가? 주님의 죽음의 뜻을 새기자. 묵상하자. 그리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자. 전도, 오직 주님은 전도를 위하여 죽으셨다. 주님은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셨다(롬 5:8). 또한, 죄인의 구원받을 길을 활짝 열어놓으셨다(히 10:20). 주님은 죽음으로서 전도하셨다. 주님보다 더 위대한 전도자는 없다. 결코, 없다. 주님은 전도자의 생애를 보여주시고 전도를 가르치셨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전도하셨다. 그 순간은 손에 못이 박힌 상태이며, 발에 못이 박힌 상태였다. 머리는 가시가 찔러서 온몸이 아프고 저리는 고통 중에 있었다. 목은 타들어 가고 땀과 피가 범벅이 되어 눈뜨기조차 힘들었을 고통 중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아픈 것에 있지 않았다. 잠시 후 생명이 끝나면 즉시 불속에 들어갈 두 강도를 생각하며 가슴 아파 하시던 주님의 모습은 우리 눈에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그 주님은 끝내 한 강도를 회개시켜 구원하셨다. 얼마나 놀라우신가! 우리 주님은 얼마나 경외할 만한가! 부활 후 주님은 양떼들을 제자들에게 부탁하시는 유언을 남기시고 승천하셨다. 이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지금도 성도가 복음을 위하여 살면 기뻐하시고 육신을 위하여 살면 슬퍼하시며 안타까워하신다(막 16:19). 바울은 이 주님을 깨닫고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전 생애를 드렸으며, 모든 제자와 선진도 그러하였다. 주님의 유언이요 명령인 전도는 이 세대의 우리의 책임이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 믿음의 선진들은 전도자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이시다(요 1:1).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쓰였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성경을 사용하시며 인간을 사용하고 계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사람을 통해 쓰셨고 사람에 의해서 사람에게 전파되었다. 여기에 전도의 중요성이 있다. 성경은 전도자의 중요성에 대해서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증거하고 있다(롬 10:15).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듣겠는가?”(롬 10:14).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에게 전도해 주신 분들이 자기만 생각하여 편함과 안일을 좇고 육신의 정욕만 좇아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겠는가? 성경에 나타난 선진들은 그칠 줄 모르고 전도하였던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하셨다. 그 후 돕는 배필 하와에게 아담은 전도했다. 하와는 그 말을 잘 새겨들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결국, 그는 사는 길과 죽는 길에서 죽는 길을 택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최초의 전도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타락한 인류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였던 노아를 성경은 평가하기를 “의를 전하는 노아와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벧후 2:5)라고 기록하고 있다. 노아는 훌륭한 전도자였다. 그는 동조자도 별로 없는 막막한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을 믿고 끝까지 의를 전파하는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 계획을 말씀하셨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에 인도하기 위하여 많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 주님의 학교에서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연단 받아 그 일을 수행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완악하여 그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으나 그는 끝까지 그 일을 계속했다. 성경은 모세에 대하여 말하기를 “믿음으로 모세는…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오, 형제여, 당신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한다면 무엇이라고 기록되겠는지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모세는 복음을 위하여 부귀와 영화와 권세를 다 포기한 훌륭한 전도자였다. 타락해 가는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부르셨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 이 목소리가 처량하게 들리지 않는가? 사랑하는 딸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러 가야 할 전도자가 필요한데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으니 주님의 마음이 어떠하셨겠는가? 주님의 이 음성을 당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도 듣지 못했으나 오직 이사야는 들었다. 그리고 대답하기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 시대의 구원받은 성도들은 “추수할 곡식은 많되 일꾼은 적다”고 탄식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필자는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이사야의 귀를 주셔서 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지금은 망설일 때가 아니다. 이것저것 계산할 때가 아니다. 우리가 망설이며 계산하며 육신의 삶을 살며 시간을 소비하는 이 순간에도 사람은 끝없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다. 오, 주여. 이 시대에도 이사야 같은 종들을 일으켜 주시옵소서. 아멘. 주님은 또한 예레미야를 부르셨다(렘 1:5). 예레미야는 대답하기를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였다. 이 겸손한 사람 예레미야를 하나님은 사용하셨다. 물론 망해 가는 나라에서 의롭게 살아간 고난의 전도자요 선지자였으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전도자의 길을 가므로 그의 생애는 오늘날까지, 그리고 영원히 빛나는 것이다. 훗날 영원의 세계, 곧 아버지의 나라에서 우리 모두 예레미야를 만날 때에 기쁨이 있으리라. 하나님이 에스겔을 부르신 때는 여호야긴 왕은 포로로 잡혀가고 유다는 시드기야가 다스리고 있던 때였다. 유다는 강퍅하여 하나님을 거역하여 망하기 직전에 와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큰 것이어서 에스겔을 보내신 것이다. 에스겔은 힘을 다하여 이스라엘의 심판과 회복과 위로를 전하며 그의 생애를 보냈다. 그 외에도 다니엘, 호세아, 요엘, 요나 등 수많은 주님의 종들이 전도자의 길을 힘을 다하여 수행하여 지금 하늘에서 자기들의 복을 누리고 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베드로를 부르셨다. 그리고 즉시 그를 부르신 목적을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주님은 즉시 순종하는 베드로를 연단하셔서 큰 전도자로 쓰셨다. 이때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랐던 베드로는 후에 회고하기를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다(벧후 1:1). 베드로의 선택은 옳았다. 그는 베드로후서를 마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있음을 본다. 주님의 제자들과 수를 알 수 없는 선진들이 복음 때문에 살고 복음 때문에 죽어갔다. 그들은 주님께 부름을 받고 주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태양처럼 뜨겁게 살다 갔다. 자기 몸을 불태우는 태양처럼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자신의 삶이 없을 뿐 아니라 땅에서는 나그네와 행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살다 갔다. 오, 형제여, 복음을 위한 삶, 전도자의 길,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계시록에 나오는 촛대처럼 당신의 인생을 녹여 태우므로 복음의 횃불을 밝히고 싶지 않은가? 하나님은 당신의 입이 필요하다. 당신의 손이 필요하다. 당신의 시간, 물질이 복음전파를 위해서 필요하다. 구원받은 성도는 누구나 전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도가 아니면 우리가 이 땅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한 영혼의 가치는 크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 :10). 만약 당신이 5,000만원의 돈을 어떤 사람에게 떼였다고 생각하여 보자. 자취를 감춘 그 사람을 찾을 길이 없어 애가 타고 있었다. 수소문하고 알아본 결과 그는 강원도 산간 어디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그는 그곳에 숨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 정보를 입수한 당신은 그곳을 즉시 찾아갈 것이다. 아무리 바쁘고 중요한 일이 있어도 그를 먼저 찾아 나설 것이다. 아마 사람들 대부분은 필자의 이 말에 동의할 줄 믿는다. 당신에게 있어 5,000만원의 돈이 그토록 중요하여 만사를 제쳐두고 찾아 나선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하늘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한 영혼을 찾아 이 세상에 오셨다면 그 한 영혼은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것은 한 영혼의 가치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도 천하만국의 부귀영화와 좋은 것을 다 뿌리치시고 한 영혼을 건지는 일에만 몰두하셨다(마 4:1-11). 억지로 왕 삼고자 할 때에도 거절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6:15). 한 영혼을 건지기 위함이 아닌가? 당신이 5,000만원 때문에 직장을 휴직하고 찾아 나선다면, 왕의 자리를 버리고 당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 영혼의 가치는 어떤 직책이나 어떤 물질의 가치와도 비교할 수 없다. 실제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하셨다(마 16:26). 주님은 이 지구를 회복시켜 살기 좋은 낙원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 세상의 제도를 바꾸거나 나라를 개혁시켜 발전시키기 위하여 오신 것도 아니다. 오직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는 영혼, 즉 물질적 가치를 온전히 초월한 영혼의 가치 때문이다. 바울은 구속의 진리를 상업적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6:20, 7:23).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이 값을 치르시고 사셨다. 모든 물건의 가치는 값으로 정해진다. 500원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은 500원의 가치를 지닌다. 그 값이 정상적이라면 그 가치는 그 이상을 결코 넘지 못한다. 물건 중에는 5,000만원, 또는 50억을 주어야 하는 것도 많다. 그 가격은 그 물건의 가치이다. 그렇다면 한 영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치르신 대가는 무엇인가? 그것은 물질로써 대체될 수 없는 것이었다(시 49:7-8). 이 일을 생각할 때 다음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한 영혼을 건지기 위하여 치르신 값은 자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비참하게 죽게 하신 것이었다. 독자도 생각해보시라. 우리가 그만한 대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초라하고 하루살이 같은 가치 없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한 영혼의 가치를 자신의 외아들을 희생시킬 만큼 크게 보셨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말씀 안에서 생각해보자. 첫째, 한 영혼을 귀히 보시고 아들을 주신 까닭은, 그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투자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평생 모은 재산 중 절반을 어느 학교 재단에 기부하였다고 하자. 여러분이 그 학교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아니하겠는가? 그 학교가 잘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몸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만드심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한다. 하나님의 생기가 인간에게 불어 넣어져서 인간이 만들어졌으니 물질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동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람은 존귀하다. 그러나 존귀한 가치를 깨달을 때 존귀한 것이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둘째, 영혼의 가치를 존귀하게 보시고 아들을 주신 까닭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이다. 아비가 자식을 귀하게 여기듯 하나님이 한 영혼을 귀히 보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3). 부모가 자식을 잊지 못하고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어떠하시겠는가(사 49:15). 창세 이래로 하나님은 사람을 귀히 보셨고 사랑하셨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까닭이다. 셋째, 한 영혼을 귀히 보시고 아들을 주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불신 영혼이 가는 지옥이 너무도 끔찍한 까닭이다. 말이야 쉽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속에서 영원히 죽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보통 생각할 문제인가? 독자들은 이 글을 읽는 순간 놀라야 한다. 심장이 뛰어야 하고 충격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실체이다. 정직한 반응이다. 만약 당신의 아들이 범죄하여 사형선고를 받게 될 상황이라면 당신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리려고 노력할 것이다. 몸부림을 칠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살릴 방법을 찾으려 할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을 닮은 존귀한 인간이 멸망의 지옥에 영원히 던져지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는가! 얼마나 고통스러우시겠는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선뜻 내어주실 수밖에 없었음이 당연하지 않은가! 한 영혼을 위하여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구원하셨지 않은가! 이러한 사랑을 받은 우리가 죽음을 각오하고 전도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도가 전도하는 것은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고 상 받을 만한 일도 아니고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내가 받은 사랑을 나누는 일이요,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일인 것이다. 주님이 벌레 같은 나의 영혼의 가치를 이토록 크게 보아주셨다면 내가 다른 영혼의 가치를 무시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전도하지 않는다면 한 영혼의 가치의 귀중함을 잊어버렸거나 무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선진들의 헌신적인 삶은 한 영혼의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였다. 독자여, 당신의 영혼이 가치를 깨달은 다른 전도자에 의해서 건져진 것과 같이, 당신도 다른 영혼의 구원을 위한 해산의 수고를 시작하지 않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일은 전도하는 일이다. 지옥 가는 사람을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 필자는 수없이 많은 날 동안 지옥 문제를 생각해오고 있는바, 어떤 경우를 말하더라도 사람이 지옥 가는 일을 막지 않을 수 없다. 지옥을 증거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 단순히 기독교 종교를 확장하는 일일 수는 없다. 이것은 생명의 생(生)과 사(死)의 문제요 인간의 지능으로 상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지옥의 고통을 면하게 하는 일인 것이다. 필자는 사석에서 가끔 여담으로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만약 대통령과 독대할 기회가 있다면,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밖에 없다. 어서 ‘지옥을 면하시오’ 하는 말이다. 이 말 이외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세상의 어떤 일이 지옥을 피하는 일보다 중하겠는가?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핑계가 있다. 그들은 그 핑계로 믿지 않는 자신을 정당화시키려 한다. 우리는 전도 전략상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때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말하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기에는 너무 급하다. 그들의 심장은 계속 뛰고 있으며 그들의 육체는 종점을 향하여 힘차게 달음질하고 있다. 그리고 그 종점에는 끔찍한 지옥이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하고 달음질하고 있다. 그들의 생명은 존귀하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시간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을 모두 낭비하고 있다. 시간과 기회의 중요성은 지옥에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의 눈물은 후회와 통곡의 부산물일 것이다. 건강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은 죄악을 행하는데, 쾌락을 즐기는데 그들의 건강을 소모하고 있다.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듣는 것을 귀찮게 여기고 있다. 그들은 불쌍한 운명에 처해 있다. 그들은 그들의 지식과 능력과 시간 등, 모든 중요한 것을 다 낭비하고 지옥에서 울게 될 것이다. 그들을 이대로 내버려 두기에는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다. 삶은 그들의 것이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삶을 사단에 종노릇하며 탕진하여 결국 자기 영혼을 망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 일에 대해서 간증하면서 고통스러운 심령을 털어놓고 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롬 9:2). 바울은 천국의 아름다움과 지옥의 끔찍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눈을 감으면 자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지옥에서 고통을 호소하며 울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한, 눈을 뜨면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람이 지옥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현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와 같은 사실 앞에서 그의 심장은 터질 듯 끓고 있었으며 그의 눈은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고통과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오직 생각나는 것은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불쌍함뿐이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근심이었다. 사도 바울의 그치지 않는 고통이었다. 이 양심적인 고통이 사도 바울을 늘 짓눌렀다. 그는 이 거룩한 고통으로 인하여 평생을 복음을 전했다. 미친 듯이 복음을 전했다. 그는 지옥의 적나라한 모습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자로서 사람들에게 지옥을 경고하는 일 외에 아무것도 중요한 일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면 그는 어디든지 갈 수 있었고 또한 갔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면 무슨 회생이든 머뭇거리지 않았다. 마치 불난 집에서 미처 나오지 못한 자식을 살리기 위해 실성한 사람처럼 불속으로 뛰어들되 위험을 전혀 생각지 않고 뛰어드는 어미와 같았다. 오로지 아기를 살리려는 생각 외에 아무 생각도 없는 어미처럼…. 이것이 바울의 생애였다. 다음 말씀이 바울의 심령을 더 잘 증거한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롬 9:3). 바울의 골육 친척들이 유대교를 고집하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못박은 유대인들처럼 여전히 이단 취급하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의 당할 지옥 형벌의 끔찍함을 알기에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의 구원을 원했다. 보통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간증이 아닌가? 전도자로서의 바울은 이토록 처절하였다. 그는 평생을 육신으로 당하는 고통과 양심적인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금일의 수많은 기독인이 바울을 사랑하고 존경한다고는 하나 바울의 이 심령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필자는 한탄하는 마음이 있다. 예수님의 고통은 어떠하셨겠는가? “이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 16: 21).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하는 말씀으로 주님은 필연적인 것을 말씀하셨다. 이 일은 꼭 이루어져야만 했으며 예수님은 이 길을 꼭 통과하여야만 하셨다. 왜냐하면, 이것이 사람을 지옥에서 건지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를 흔드는 놀라운 진리를 알 리가 없는 제자 베드로는 “그리 마옵소서” 하고 말리지 않았던가! 그 결과 그는 “사단아” 하는 책망을 듣고 말았다. 베드로의 생애에 가장 수치스러웠던 순간 중 하나였을 것이다. 영적인 의미를 깊이 깨닫지 못하고 육신으로 말하는 베드로의 행동은 사단의 생각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오, 성도들이여,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옥 가는 영혼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예수님의 생애가 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 바울의 삶이 증명하고 있다. 필리핀, 캄보디아, 태국에서 독충과 싸우며, 고독을 극복하며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증인이다.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람을 지옥에 가도록 그대로 버려둘 수는 없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삶이 복음을 위한 고난으로 바뀌기 바란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기 바란다. 이 일이 우리가 호흡하는 유일한 이유이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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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도해야 하는가? 전도하지 않는 것은 죄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16).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성도가 전도하지 않는 것은 죄다.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가 멸망의 지옥을 외치며 경고하지 않는다면 이는 분명 문제가 있다. 이것을 어찌 죄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인간의 상상과 경험을 초월하는 너무도 끔찍한 멸망의 지옥에서 건져졌으면서, 그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 불쌍한 자들을 어찌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 우리에게 그 길을 가르쳐주지 않고 방관하고 있었다면 우리가 그 멸망의 지옥 형벌에서 구원받았겠는가? 우리가 구원받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기도와 전도와 물질적 헌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 열매로 구원받은 우리가 이제 그 전도의 길을 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구원받던 때를 회상하여 보라. 얼마나 놀라웠던가! 또 얼마나 감격스러우며 기뻤던가! 이제 이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데 우리가 쓰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구원의 길을 깨닫지 못하고 방황하던 때의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불쌍했던가? 그때 우리는 절망 중에 죽음을 생각하기도 하였다. 세상 모든 일이 뒤 틀려 보이고, 정의와 진리가 다 사라져버린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하였다. 형제여, 그런 사람은 지금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 사람을 구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지금도 슬프고 애타는 눈망울로 누군가가 구해주기를 기다리는 길 잃은 양 떼들을 형제는 외면할 것인가? 정녕 외면할 것인가? 도대체 사람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져내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것은 영원에 관한 일인데 순간 있다가 사라지는 세상의 어떤 일이 이보다 더 중요할 수 있겠는가? 성도가 전도하지 않은 것이 죄인 까닭은 첫째로, 사람의 영혼을 지옥으로 가도록 버려두는 일이요, 폭력은 몸만 해치는 죄가 되지만 전도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몸과 영혼을 지옥에 밀어 넣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단코 문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가 무관심하고 졸며 세상에 취해있는 동안 우리를 원망하면서 슬픈 비명을 지르며 지옥으로 빠져들어 가는 영혼들의 절규를 우리는 왜 듣지 못하는가? 이제 우리의 길은 분명하지 않는가? 우리의 가치관은 분명해지지 않았는가? 이제 돈을 벌어도 복음을 위하여 벌어야 한다. 직장에 다니는 것도 복음을 위하여 다니는 것이다. 공부하거나 가사노동을 하거나 무엇을 하든지 내가 오늘 숨 쉬고 있는 것은 오직 복음을 위하여 있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수고가, 우리의 헌신이, 우리의 눈물과 기도와 전도가 지옥에서 한 영혼만 건진다고 하여도 이는 참으로 위대한 일이요, 가치 있는 일이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16). 우리가 바울의 이 심정을 이해하고 동참할 수만 있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열매가 주님으로부터 있을 것이다. 둘째로, 전도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고백한 믿음을 우리 스스로가 지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14장 23절 후반에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믿음이 동기가 되지 아니한 행동은 죄라고 정의하고 있다. 필자는 어느 집회에 참석하여 성도들에게 질문하였다. “여러분, 지옥을 믿습니까?” 모두가 “예” 하고 답변하였다. 필자는 즉시 외쳤다. “그런데 왜 전도하지 않습니까?” 지옥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전도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맞지 않는 행동인가? 영영 꺼지지 않는 불못에서 고통 중에 뛰고 있을 불쌍한 영혼과 육신들이 고통당하는 지옥을 믿는다면서 전도하지 않거나, 전도를 위해 투자하지 않는다면, 또는 투자한다고 하여도 인색하다면 이는 실로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결론은 분명해졌다. 우리는 지옥을 믿는다고 말하지 말든지, 아니면 주님 앞에 통회하고 복음을 위하여 살든지 선택해야 한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7절에서 외치고 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오로지 복음만을 위하여 한평생 살다간 바울이 오늘 우리 앞에 나타난다 해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라”는 말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엄히 명하노니 말씀을 전파하라.” 형제여,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짧게 살다갈 허무한 인생을 영원을 위하여 투자하지 않겠는가? 이 길보다 더 가치 있고 위대한 길이 없기에 권하는 말이다. 주님의 명령이요 유언이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6). 인생이 70, 혹은 80년을 살다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같이 하찮은 모습으로 가면서 한 마디 유언을 남길지라도 사람들은 멸시하지 않는다. 하물며 천지의 주재요 창조주이시면서 자신을 낮추사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 예수님의 유언에 대해 우리가 무시하거나 무관심하다면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은 승천 직전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 곧 유언의 말씀이다. 통상적으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바로는 사람이 죽음 직전에 하는 유언은 중요한 말을 하게 된다. 주님께서 승천 직전에 하신 이 유언의 말씀도 너무나 중요한 말씀인 것이다. 이 말씀 속에는 주님의 전 생애가 함축되어 있다. 주님은 왜 세상에 오셨는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딤전 1:15). 그렇다. 주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세상에 오실 이유도 없고, 오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멸망의 지옥을 향하여 달려가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셨다면 주님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음이 분명하다. 주님의 공생애를 보라. 온갖 죄와 질병과 고통에 사로잡힌 죄인을 그 모든 고통에서 해방해 주시기 위하여 쉴 겨를도 없이 분주하셨던 주님이 아니신가! 우물가에 나오는 일이 고통스러웠던 불쌍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지 않고는 그냥 지나칠 수 없으셨던,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으셨던 동정 많은 주님이 아니셨던가! 그 여인은 자신의 죄로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절망 가운데서 있었으나 주님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되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막 1:38). 이 얼마나 주님의 삶을 잘 표현한 말씀인가! 주님은 전도하기 위하여 오셨고 사셨고, 전도하기 위하여 죽으셨고 부활하셨다. 성령님을 보내신 목적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함이다. 주님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보자.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는데 여기에 전도에 대한 목적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라”(막 3:14).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 승천 후 한결같이 전도자들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하여 전 생애를 바쳤으며 복음을 위하여 대부분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원받은 성도가 복음을 위하여 산다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을까? 이보다 더 가치 있고 바람직한 일이 있을까? 이 길은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길이며 제자들이 따라갔던 길이며, 수많은 믿음의 선진이 걸어갔던 길이다. 교회사 2,000여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주의 종들이 피 흘려 복음을 전했는가! 그들의 희생과 그들의 고생과 눈물, 그들이 흘린 핏값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복음이 전해졌거늘 어떤 성도라 일컫는 자들은 우연히 받은 구원처럼 값없고 가치 없는 일에 시간과 물질을 소모하는 예를 볼 때 슬픔을 금할 수 없다. 이런 일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요, 사단을 도와주는 일이다. 이런 일들은 주님의 일에 동역한 것이 아닌 사단의 일에 동역한 셈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일이다. 성도가 사단에게 속아 분별이 없을 때 이런 일이 가능하다. 주님은 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던가? 너무도 잘 아는 사실이나 성도들이 쉽게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 53:5). 복음 전도를 위하여 주님처럼 죽는 데까지는 못 가도 헌신과 수고를 망설여서야 하겠는가? 주님의 죽음의 뜻을 새기자. 묵상하자. 그리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자. 전도, 오직 주님은 전도를 위하여 죽으셨다. 주님은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셨다(롬 5:8). 또한, 죄인의 구원받을 길을 활짝 열어놓으셨다(히 10:20). 주님은 죽음으로서 전도하셨다. 주님보다 더 위대한 전도자는 없다. 결코, 없다. 주님은 전도자의 생애를 보여주시고 전도를 가르치셨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전도하셨다. 그 순간은 손에 못이 박힌 상태이며, 발에 못이 박힌 상태였다. 머리는 가시가 찔러서 온몸이 아프고 저리는 고통 중에 있었다. 목은 타들어 가고 땀과 피가 범벅이 되어 눈뜨기조차 힘들었을 고통 중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아픈 것에 있지 않았다. 잠시 후 생명이 끝나면 즉시 불속에 들어갈 두 강도를 생각하며 가슴 아파 하시던 주님의 모습은 우리 눈에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그 주님은 끝내 한 강도를 회개시켜 구원하셨다. 얼마나 놀라우신가! 우리 주님은 얼마나 경외할 만한가! 부활 후 주님은 양떼들을 제자들에게 부탁하시는 유언을 남기시고 승천하셨다. 이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지금도 성도가 복음을 위하여 살면 기뻐하시고 육신을 위하여 살면 슬퍼하시며 안타까워하신다(막 16:19). 바울은 이 주님을 깨닫고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전 생애를 드렸으며, 모든 제자와 선진도 그러하였다. 주님의 유언이요 명령인 전도는 이 세대의 우리의 책임이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 믿음의 선진들은 전도자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이시다(요 1:1).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쓰였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성경을 사용하시며 인간을 사용하고 계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사람을 통해 쓰셨고 사람에 의해서 사람에게 전파되었다. 여기에 전도의 중요성이 있다. 성경은 전도자의 중요성에 대해서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증거하고 있다(롬 10:15).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듣겠는가?”(롬 10:14).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에게 전도해 주신 분들이 자기만 생각하여 편함과 안일을 좇고 육신의 정욕만 좇아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겠는가? 성경에 나타난 선진들은 그칠 줄 모르고 전도하였던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하셨다. 그 후 돕는 배필 하와에게 아담은 전도했다. 하와는 그 말을 잘 새겨들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결국, 그는 사는 길과 죽는 길에서 죽는 길을 택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최초의 전도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타락한 인류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였던 노아를 성경은 평가하기를 “의를 전하는 노아와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벧후 2:5)라고 기록하고 있다. 노아는 훌륭한 전도자였다. 그는 동조자도 별로 없는 막막한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을 믿고 끝까지 의를 전파하는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 계획을 말씀하셨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에 인도하기 위하여 많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 주님의 학교에서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연단 받아 그 일을 수행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완악하여 그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으나 그는 끝까지 그 일을 계속했다. 성경은 모세에 대하여 말하기를 “믿음으로 모세는…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오, 형제여, 당신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한다면 무엇이라고 기록되겠는지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모세는 복음을 위하여 부귀와 영화와 권세를 다 포기한 훌륭한 전도자였다. 타락해 가는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부르셨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 이 목소리가 처량하게 들리지 않는가? 사랑하는 딸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러 가야 할 전도자가 필요한데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으니 주님의 마음이 어떠하셨겠는가? 주님의 이 음성을 당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도 듣지 못했으나 오직 이사야는 들었다. 그리고 대답하기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 시대의 구원받은 성도들은 “추수할 곡식은 많되 일꾼은 적다”고 탄식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필자는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이사야의 귀를 주셔서 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지금은 망설일 때가 아니다. 이것저것 계산할 때가 아니다. 우리가 망설이며 계산하며 육신의 삶을 살며 시간을 소비하는 이 순간에도 사람은 끝없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다. 오, 주여. 이 시대에도 이사야 같은 종들을 일으켜 주시옵소서. 아멘. 주님은 또한 예레미야를 부르셨다(렘 1:5). 예레미야는 대답하기를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였다. 이 겸손한 사람 예레미야를 하나님은 사용하셨다. 물론 망해 가는 나라에서 의롭게 살아간 고난의 전도자요 선지자였으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전도자의 길을 가므로 그의 생애는 오늘날까지, 그리고 영원히 빛나는 것이다. 훗날 영원의 세계, 곧 아버지의 나라에서 우리 모두 예레미야를 만날 때에 기쁨이 있으리라. 하나님이 에스겔을 부르신 때는 여호야긴 왕은 포로로 잡혀가고 유다는 시드기야가 다스리고 있던 때였다. 유다는 강퍅하여 하나님을 거역하여 망하기 직전에 와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큰 것이어서 에스겔을 보내신 것이다. 에스겔은 힘을 다하여 이스라엘의 심판과 회복과 위로를 전하며 그의 생애를 보냈다. 그 외에도 다니엘, 호세아, 요엘, 요나 등 수많은 주님의 종들이 전도자의 길을 힘을 다하여 수행하여 지금 하늘에서 자기들의 복을 누리고 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베드로를 부르셨다. 그리고 즉시 그를 부르신 목적을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주님은 즉시 순종하는 베드로를 연단하셔서 큰 전도자로 쓰셨다. 이때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랐던 베드로는 후에 회고하기를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다(벧후 1:1). 베드로의 선택은 옳았다. 그는 베드로후서를 마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있음을 본다. 주님의 제자들과 수를 알 수 없는 선진들이 복음 때문에 살고 복음 때문에 죽어갔다. 그들은 주님께 부름을 받고 주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태양처럼 뜨겁게 살다 갔다. 자기 몸을 불태우는 태양처럼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자신의 삶이 없을 뿐 아니라 땅에서는 나그네와 행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살다 갔다. 오, 형제여, 복음을 위한 삶, 전도자의 길,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계시록에 나오는 촛대처럼 당신의 인생을 녹여 태우므로 복음의 횃불을 밝히고 싶지 않은가? 하나님은 당신의 입이 필요하다. 당신의 손이 필요하다. 당신의 시간, 물질이 복음전파를 위해서 필요하다. 구원받은 성도는 누구나 전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도가 아니면 우리가 이 땅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한 영혼의 가치는 크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 :10). 만약 당신이 5,000만원의 돈을 어떤 사람에게 떼였다고 생각하여 보자. 자취를 감춘 그 사람을 찾을 길이 없어 애가 타고 있었다. 수소문하고 알아본 결과 그는 강원도 산간 어디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그는 그곳에 숨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 정보를 입수한 당신은 그곳을 즉시 찾아갈 것이다. 아무리 바쁘고 중요한 일이 있어도 그를 먼저 찾아 나설 것이다. 아마 사람들 대부분은 필자의 이 말에 동의할 줄 믿는다. 당신에게 있어 5,000만원의 돈이 그토록 중요하여 만사를 제쳐두고 찾아 나선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하늘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한 영혼을 찾아 이 세상에 오셨다면 그 한 영혼은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것은 한 영혼의 가치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도 천하만국의 부귀영화와 좋은 것을 다 뿌리치시고 한 영혼을 건지는 일에만 몰두하셨다(마 4:1-11). 억지로 왕 삼고자 할 때에도 거절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6:15). 한 영혼을 건지기 위함이 아닌가? 당신이 5,000만원 때문에 직장을 휴직하고 찾아 나선다면, 왕의 자리를 버리고 당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 영혼의 가치는 어떤 직책이나 어떤 물질의 가치와도 비교할 수 없다. 실제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하셨다(마 16:26). 주님은 이 지구를 회복시켜 살기 좋은 낙원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 세상의 제도를 바꾸거나 나라를 개혁시켜 발전시키기 위하여 오신 것도 아니다. 오직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는 영혼, 즉 물질적 가치를 온전히 초월한 영혼의 가치 때문이다. 바울은 구속의 진리를 상업적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6:20, 7:23).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이 값을 치르시고 사셨다. 모든 물건의 가치는 값으로 정해진다. 500원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은 500원의 가치를 지닌다. 그 값이 정상적이라면 그 가치는 그 이상을 결코 넘지 못한다. 물건 중에는 5,000만원, 또는 50억을 주어야 하는 것도 많다. 그 가격은 그 물건의 가치이다. 그렇다면 한 영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치르신 대가는 무엇인가? 그것은 물질로써 대체될 수 없는 것이었다(시 49:7-8). 이 일을 생각할 때 다음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한 영혼을 건지기 위하여 치르신 값은 자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비참하게 죽게 하신 것이었다. 독자도 생각해보시라. 우리가 그만한 대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초라하고 하루살이 같은 가치 없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한 영혼의 가치를 자신의 외아들을 희생시킬 만큼 크게 보셨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말씀 안에서 생각해보자. 첫째, 한 영혼을 귀히 보시고 아들을 주신 까닭은, 그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투자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평생 모은 재산 중 절반을 어느 학교 재단에 기부하였다고 하자. 여러분이 그 학교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아니하겠는가? 그 학교가 잘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몸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만드심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한다. 하나님의 생기가 인간에게 불어 넣어져서 인간이 만들어졌으니 물질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동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람은 존귀하다. 그러나 존귀한 가치를 깨달을 때 존귀한 것이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둘째, 영혼의 가치를 존귀하게 보시고 아들을 주신 까닭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이다. 아비가 자식을 귀하게 여기듯 하나님이 한 영혼을 귀히 보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3). 부모가 자식을 잊지 못하고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어떠하시겠는가(사 49:15). 창세 이래로 하나님은 사람을 귀히 보셨고 사랑하셨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까닭이다. 셋째, 한 영혼을 귀히 보시고 아들을 주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불신 영혼이 가는 지옥이 너무도 끔찍한 까닭이다. 말이야 쉽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속에서 영원히 죽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보통 생각할 문제인가? 독자들은 이 글을 읽는 순간 놀라야 한다. 심장이 뛰어야 하고 충격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실체이다. 정직한 반응이다. 만약 당신의 아들이 범죄하여 사형선고를 받게 될 상황이라면 당신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리려고 노력할 것이다. 몸부림을 칠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살릴 방법을 찾으려 할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을 닮은 존귀한 인간이 멸망의 지옥에 영원히 던져지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는가! 얼마나 고통스러우시겠는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선뜻 내어주실 수밖에 없었음이 당연하지 않은가! 한 영혼을 위하여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구원하셨지 않은가! 이러한 사랑을 받은 우리가 죽음을 각오하고 전도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도가 전도하는 것은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고 상 받을 만한 일도 아니고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내가 받은 사랑을 나누는 일이요,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일인 것이다. 주님이 벌레 같은 나의 영혼의 가치를 이토록 크게 보아주셨다면 내가 다른 영혼의 가치를 무시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전도하지 않는다면 한 영혼의 가치의 귀중함을 잊어버렸거나 무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선진들의 헌신적인 삶은 한 영혼의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였다. 독자여, 당신의 영혼이 가치를 깨달은 다른 전도자에 의해서 건져진 것과 같이, 당신도 다른 영혼의 구원을 위한 해산의 수고를 시작하지 않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일은 전도하는 일이다. 지옥 가는 사람을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 필자는 수없이 많은 날 동안 지옥 문제를 생각해오고 있는바, 어떤 경우를 말하더라도 사람이 지옥 가는 일을 막지 않을 수 없다. 지옥을 증거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 단순히 기독교 종교를 확장하는 일일 수는 없다. 이것은 생명의 생(生)과 사(死)의 문제요 인간의 지능으로 상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지옥의 고통을 면하게 하는 일인 것이다. 필자는 사석에서 가끔 여담으로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만약 대통령과 독대할 기회가 있다면,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밖에 없다. 어서 ‘지옥을 면하시오’ 하는 말이다. 이 말 이외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세상의 어떤 일이 지옥을 피하는 일보다 중하겠는가?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핑계가 있다. 그들은 그 핑계로 믿지 않는 자신을 정당화시키려 한다. 우리는 전도 전략상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때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말하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기에는 너무 급하다. 그들의 심장은 계속 뛰고 있으며 그들의 육체는 종점을 향하여 힘차게 달음질하고 있다. 그리고 그 종점에는 끔찍한 지옥이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하고 달음질하고 있다. 그들의 생명은 존귀하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시간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을 모두 낭비하고 있다. 시간과 기회의 중요성은 지옥에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의 눈물은 후회와 통곡의 부산물일 것이다. 건강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은 죄악을 행하는데, 쾌락을 즐기는데 그들의 건강을 소모하고 있다.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듣는 것을 귀찮게 여기고 있다. 그들은 불쌍한 운명에 처해 있다. 그들은 그들의 지식과 능력과 시간 등, 모든 중요한 것을 다 낭비하고 지옥에서 울게 될 것이다. 그들을 이대로 내버려 두기에는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다. 삶은 그들의 것이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삶을 사단에 종노릇하며 탕진하여 결국 자기 영혼을 망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 일에 대해서 간증하면서 고통스러운 심령을 털어놓고 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롬 9:2). 바울은 천국의 아름다움과 지옥의 끔찍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눈을 감으면 자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지옥에서 고통을 호소하며 울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한, 눈을 뜨면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람이 지옥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현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와 같은 사실 앞에서 그의 심장은 터질 듯 끓고 있었으며 그의 눈은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고통과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오직 생각나는 것은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불쌍함뿐이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근심이었다. 사도 바울의 그치지 않는 고통이었다. 이 양심적인 고통이 사도 바울을 늘 짓눌렀다. 그는 이 거룩한 고통으로 인하여 평생을 복음을 전했다. 미친 듯이 복음을 전했다. 그는 지옥의 적나라한 모습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자로서 사람들에게 지옥을 경고하는 일 외에 아무것도 중요한 일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면 그는 어디든지 갈 수 있었고 또한 갔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면 무슨 회생이든 머뭇거리지 않았다. 마치 불난 집에서 미처 나오지 못한 자식을 살리기 위해 실성한 사람처럼 불속으로 뛰어들되 위험을 전혀 생각지 않고 뛰어드는 어미와 같았다. 오로지 아기를 살리려는 생각 외에 아무 생각도 없는 어미처럼…. 이것이 바울의 생애였다. 다음 말씀이 바울의 심령을 더 잘 증거한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롬 9:3). 바울의 골육 친척들이 유대교를 고집하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못박은 유대인들처럼 여전히 이단 취급하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의 당할 지옥 형벌의 끔찍함을 알기에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의 구원을 원했다. 보통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간증이 아닌가? 전도자로서의 바울은 이토록 처절하였다. 그는 평생을 육신으로 당하는 고통과 양심적인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금일의 수많은 기독인이 바울을 사랑하고 존경한다고는 하나 바울의 이 심령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필자는 한탄하는 마음이 있다. 예수님의 고통은 어떠하셨겠는가? “이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 16: 21).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하는 말씀으로 주님은 필연적인 것을 말씀하셨다. 이 일은 꼭 이루어져야만 했으며 예수님은 이 길을 꼭 통과하여야만 하셨다. 왜냐하면, 이것이 사람을 지옥에서 건지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를 흔드는 놀라운 진리를 알 리가 없는 제자 베드로는 “그리 마옵소서” 하고 말리지 않았던가! 그 결과 그는 “사단아” 하는 책망을 듣고 말았다. 베드로의 생애에 가장 수치스러웠던 순간 중 하나였을 것이다. 영적인 의미를 깊이 깨닫지 못하고 육신으로 말하는 베드로의 행동은 사단의 생각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오, 성도들이여,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옥 가는 영혼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예수님의 생애가 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 바울의 삶이 증명하고 있다. 필리핀, 캄보디아, 태국에서 독충과 싸우며, 고독을 극복하며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증인이다.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람을 지옥에 가도록 그대로 버려둘 수는 없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삶이 복음을 위한 고난으로 바뀌기 바란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기 바란다. 이 일이 우리가 호흡하는 유일한 이유이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
서평 |
복음은 영원히 바뀔 수 없다. 바뀌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그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시대와 장소와 대상에 따라서 바뀌어야 한다. 서양에서 들어온 복음이지만 전도하는 방법까지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된다고 보되, 한국의 실정에 맞는 다양한 방법들이 연구되어야 한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생각, 문화 수준, 가치관 등 많은 부분에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 60억의 인구가 있다면 구도자의 상태 또한 60억 가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다양한 이들에게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이것이 전도자들의 과제이다. 세상에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상품 하나를 팔기 위해 온갖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고 노력한다. 그들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영생을 전하는 우리랴! 이 책이 영혼의 가치를 아는 투자자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끝으로, 부족한 소제의 글을 이렇게 책으로 만들어 많은 전도자에게 도움을 주신 전도출판사에 감사드린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책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고 열매를 거두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
목차 |
서문……………………………………………………………………8 왜 전도해야 하는가?………………………………………………9 전도하지 않는 것은 죄다 / 9 주님의 명령이요 유언이다 / 12 믿음의 선진들은 전도자였다 / 15 한 영혼의 가치는 크다 / 19 지옥 가는 영혼을 내버려둘 수는 없다 / 22 전도란 무엇인가?…………………………………………………27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 27 증인이 되는 것이다 / 29 영적인 전쟁이다 / 32 씨를 뿌리는 일이다 / 36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다 / 40 경고의 나팔을 부는 것이다 / 44 귀신을 내쫓는 것이다 / 47 인생 최고의 사업이다 / 50 전도자의 자세와 인격………………………………………………55 능력 있는 전도자 / 55 부지런한 전도자 / 58 확신 있는 전도자 / 61 충성스러운 전도자 / 65 훈련된 전도자 / 68 연구하는 전도자 / 72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 접근………………………………………76 접근 단계 / 76 단계적인 접근 / 79 접근의 방해물들 / 86 접근에 관한 또 다른 조언들 / 90 접근의 결론 / 94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 진단…………………………………… 99 초기 진단 / 99 어떻게 진단할 것인가? / 102 그가 처한 상황을 진단하라 / 106 영혼의 상태를 진단하라 / 109 질문이나 답변 속에 감추인 의도를 진단하라 / 113 진단을 위한 기도와 노력 / 116 구도자를 진단하라 / 120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 전투 ……………………………………124 전투단계 / 124 전도전략 / 128 개인적인 전도전략 / 133 교회적인 전도전략 / 136 소명의식의 결여 / 140 헌신의 결여 / 145 헌신된 전도 / 151 사랑의 결여 / 155 건강한 교회의 전도 / 159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 파괴……………………………………165 파괴단계 / 165 무엇을 파괴할 것인가? / 170 정곡을 찾아라 / 175 정곡을 찾는데 무관심한 이유 / 180 낙심하지 말라 / 186 어떻게 증거할 것인가?…………………………………………193 주님의 권위로 굴복시켜라 / 193 끌려다니지 말라 / 203 은혜로 녹여라 / 209 구도자를 감동시켜라 / 215 말싸움에서 지지 말라 / 221 놀라게 하라 / 228 의심을 풀어주라 / 235 논리로 이해시켜라 / 242 생각하게 하라 / 249 무엇을 증거할 것인가?…………………………………………… 256 지옥을 전하라 / 256 죄와 그 결국을 전하라 / 261 심판의 하나님을 알게 하라 / 268 성경의 역사성을 전하라 / 275 천국을 전하라 / 282 말씀의 능력을 전하라 / 289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라 / 296 |
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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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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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왜 전도해야 하는가? 전도하지 않는 것은 죄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16).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성도가 전도하지 않는 것은 죄다.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가 멸망의 지옥을 외치며 경고하지 않는다면 이는 분명 문제가 있다. 이것을 어찌 죄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인간의 상상과 경험을 초월하는 너무도 끔찍한 멸망의 지옥에서 건져졌으면서, 그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 불쌍한 자들을 어찌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 우리에게 그 길을 가르쳐주지 않고 방관하고 있었다면 우리가 그 멸망의 지옥 형벌에서 구원받았겠는가? 우리가 구원받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기도와 전도와 물질적 헌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 열매로 구원받은 우리가 이제 그 전도의 길을 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구원받던 때를 회상하여 보라. 얼마나 놀라웠던가! 또 얼마나 감격스러우며 기뻤던가! 이제 이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데 우리가 쓰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구원의 길을 깨닫지 못하고 방황하던 때의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불쌍했던가? 그때 우리는 절망 중에 죽음을 생각하기도 하였다. 세상 모든 일이 뒤 틀려 보이고, 정의와 진리가 다 사라져버린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하였다. 형제여, 그런 사람은 지금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 사람을 구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지금도 슬프고 애타는 눈망울로 누군가가 구해주기를 기다리는 길 잃은 양 떼들을 형제는 외면할 것인가? 정녕 외면할 것인가? 도대체 사람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져내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것은 영원에 관한 일인데 순간 있다가 사라지는 세상의 어떤 일이 이보다 더 중요할 수 있겠는가? 성도가 전도하지 않은 것이 죄인 까닭은 첫째로, 사람의 영혼을 지옥으로 가도록 버려두는 일이요, 폭력은 몸만 해치는 죄가 되지만 전도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몸과 영혼을 지옥에 밀어 넣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단코 문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가 무관심하고 졸며 세상에 취해있는 동안 우리를 원망하면서 슬픈 비명을 지르며 지옥으로 빠져들어 가는 영혼들의 절규를 우리는 왜 듣지 못하는가? 이제 우리의 길은 분명하지 않는가? 우리의 가치관은 분명해지지 않았는가? 이제 돈을 벌어도 복음을 위하여 벌어야 한다. 직장에 다니는 것도 복음을 위하여 다니는 것이다. 공부하거나 가사노동을 하거나 무엇을 하든지 내가 오늘 숨 쉬고 있는 것은 오직 복음을 위하여 있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수고가, 우리의 헌신이, 우리의 눈물과 기도와 전도가 지옥에서 한 영혼만 건진다고 하여도 이는 참으로 위대한 일이요, 가치 있는 일이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16). 우리가 바울의 이 심정을 이해하고 동참할 수만 있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열매가 주님으로부터 있을 것이다. 둘째로, 전도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고백한 믿음을 우리 스스로가 지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14장 23절 후반에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믿음이 동기가 되지 아니한 행동은 죄라고 정의하고 있다. 필자는 어느 집회에 참석하여 성도들에게 질문하였다. “여러분, 지옥을 믿습니까?” 모두가 “예” 하고 답변하였다. 필자는 즉시 외쳤다. “그런데 왜 전도하지 않습니까?” 지옥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전도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맞지 않는 행동인가? 영영 꺼지지 않는 불못에서 고통 중에 뛰고 있을 불쌍한 영혼과 육신들이 고통당하는 지옥을 믿는다면서 전도하지 않거나, 전도를 위해 투자하지 않는다면, 또는 투자한다고 하여도 인색하다면 이는 실로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결론은 분명해졌다. 우리는 지옥을 믿는다고 말하지 말든지, 아니면 주님 앞에 통회하고 복음을 위하여 살든지 선택해야 한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7절에서 외치고 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오로지 복음만을 위하여 한평생 살다간 바울이 오늘 우리 앞에 나타난다 해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라”는 말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엄히 명하노니 말씀을 전파하라.” 형제여,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짧게 살다갈 허무한 인생을 영원을 위하여 투자하지 않겠는가? 이 길보다 더 가치 있고 위대한 길이 없기에 권하는 말이다. 주님의 명령이요 유언이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6). 인생이 70, 혹은 80년을 살다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같이 하찮은 모습으로 가면서 한 마디 유언을 남길지라도 사람들은 멸시하지 않는다. 하물며 천지의 주재요 창조주이시면서 자신을 낮추사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 예수님의 유언에 대해 우리가 무시하거나 무관심하다면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은 승천 직전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 곧 유언의 말씀이다. 통상적으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바로는 사람이 죽음 직전에 하는 유언은 중요한 말을 하게 된다. 주님께서 승천 직전에 하신 이 유언의 말씀도 너무나 중요한 말씀인 것이다. 이 말씀 속에는 주님의 전 생애가 함축되어 있다. 주님은 왜 세상에 오셨는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딤전 1:15). 그렇다. 주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세상에 오실 이유도 없고, 오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멸망의 지옥을 향하여 달려가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셨다면 주님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음이 분명하다. 주님의 공생애를 보라. 온갖 죄와 질병과 고통에 사로잡힌 죄인을 그 모든 고통에서 해방해 주시기 위하여 쉴 겨를도 없이 분주하셨던 주님이 아니신가! 우물가에 나오는 일이 고통스러웠던 불쌍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지 않고는 그냥 지나칠 수 없으셨던,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으셨던 동정 많은 주님이 아니셨던가! 그 여인은 자신의 죄로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절망 가운데서 있었으나 주님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되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막 1:38). 이 얼마나 주님의 삶을 잘 표현한 말씀인가! 주님은 전도하기 위하여 오셨고 사셨고, 전도하기 위하여 죽으셨고 부활하셨다. 성령님을 보내신 목적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함이다. 주님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보자.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는데 여기에 전도에 대한 목적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라”(막 3:14).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 승천 후 한결같이 전도자들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하여 전 생애를 바쳤으며 복음을 위하여 대부분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원받은 성도가 복음을 위하여 산다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을까? 이보다 더 가치 있고 바람직한 일이 있을까? 이 길은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길이며 제자들이 따라갔던 길이며, 수많은 믿음의 선진이 걸어갔던 길이다. 교회사 2,000여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주의 종들이 피 흘려 복음을 전했는가! 그들의 희생과 그들의 고생과 눈물, 그들이 흘린 핏값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복음이 전해졌거늘 어떤 성도라 일컫는 자들은 우연히 받은 구원처럼 값없고 가치 없는 일에 시간과 물질을 소모하는 예를 볼 때 슬픔을 금할 수 없다. 이런 일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요, 사단을 도와주는 일이다. 이런 일들은 주님의 일에 동역한 것이 아닌 사단의 일에 동역한 셈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일이다. 성도가 사단에게 속아 분별이 없을 때 이런 일이 가능하다. 주님은 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던가? 너무도 잘 아는 사실이나 성도들이 쉽게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 53:5). 복음 전도를 위하여 주님처럼 죽는 데까지는 못 가도 헌신과 수고를 망설여서야 하겠는가? 주님의 죽음의 뜻을 새기자. 묵상하자. 그리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자. 전도, 오직 주님은 전도를 위하여 죽으셨다. 주님은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셨다(롬 5:8). 또한, 죄인의 구원받을 길을 활짝 열어놓으셨다(히 10:20). 주님은 죽음으로서 전도하셨다. 주님보다 더 위대한 전도자는 없다. 결코, 없다. 주님은 전도자의 생애를 보여주시고 전도를 가르치셨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전도하셨다. 그 순간은 손에 못이 박힌 상태이며, 발에 못이 박힌 상태였다. 머리는 가시가 찔러서 온몸이 아프고 저리는 고통 중에 있었다. 목은 타들어 가고 땀과 피가 범벅이 되어 눈뜨기조차 힘들었을 고통 중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아픈 것에 있지 않았다. 잠시 후 생명이 끝나면 즉시 불속에 들어갈 두 강도를 생각하며 가슴 아파 하시던 주님의 모습은 우리 눈에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그 주님은 끝내 한 강도를 회개시켜 구원하셨다. 얼마나 놀라우신가! 우리 주님은 얼마나 경외할 만한가! 부활 후 주님은 양떼들을 제자들에게 부탁하시는 유언을 남기시고 승천하셨다. 이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지금도 성도가 복음을 위하여 살면 기뻐하시고 육신을 위하여 살면 슬퍼하시며 안타까워하신다(막 16:19). 바울은 이 주님을 깨닫고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전 생애를 드렸으며, 모든 제자와 선진도 그러하였다. 주님의 유언이요 명령인 전도는 이 세대의 우리의 책임이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 믿음의 선진들은 전도자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이시다(요 1:1).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쓰였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성경을 사용하시며 인간을 사용하고 계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사람을 통해 쓰셨고 사람에 의해서 사람에게 전파되었다. 여기에 전도의 중요성이 있다. 성경은 전도자의 중요성에 대해서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증거하고 있다(롬 10:15).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듣겠는가?”(롬 10:14).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에게 전도해 주신 분들이 자기만 생각하여 편함과 안일을 좇고 육신의 정욕만 좇아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겠는가? 성경에 나타난 선진들은 그칠 줄 모르고 전도하였던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하셨다. 그 후 돕는 배필 하와에게 아담은 전도했다. 하와는 그 말을 잘 새겨들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결국, 그는 사는 길과 죽는 길에서 죽는 길을 택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최초의 전도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타락한 인류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였던 노아를 성경은 평가하기를 “의를 전하는 노아와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벧후 2:5)라고 기록하고 있다. 노아는 훌륭한 전도자였다. 그는 동조자도 별로 없는 막막한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을 믿고 끝까지 의를 전파하는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 계획을 말씀하셨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에 인도하기 위하여 많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 주님의 학교에서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연단 받아 그 일을 수행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완악하여 그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으나 그는 끝까지 그 일을 계속했다. 성경은 모세에 대하여 말하기를 “믿음으로 모세는…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오, 형제여, 당신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한다면 무엇이라고 기록되겠는지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모세는 복음을 위하여 부귀와 영화와 권세를 다 포기한 훌륭한 전도자였다. 타락해 가는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부르셨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 이 목소리가 처량하게 들리지 않는가? 사랑하는 딸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러 가야 할 전도자가 필요한데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으니 주님의 마음이 어떠하셨겠는가? 주님의 이 음성을 당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도 듣지 못했으나 오직 이사야는 들었다. 그리고 대답하기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 시대의 구원받은 성도들은 “추수할 곡식은 많되 일꾼은 적다”고 탄식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필자는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이사야의 귀를 주셔서 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지금은 망설일 때가 아니다. 이것저것 계산할 때가 아니다. 우리가 망설이며 계산하며 육신의 삶을 살며 시간을 소비하는 이 순간에도 사람은 끝없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다. 오, 주여. 이 시대에도 이사야 같은 종들을 일으켜 주시옵소서. 아멘. 주님은 또한 예레미야를 부르셨다(렘 1:5). 예레미야는 대답하기를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였다. 이 겸손한 사람 예레미야를 하나님은 사용하셨다. 물론 망해 가는 나라에서 의롭게 살아간 고난의 전도자요 선지자였으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전도자의 길을 가므로 그의 생애는 오늘날까지, 그리고 영원히 빛나는 것이다. 훗날 영원의 세계, 곧 아버지의 나라에서 우리 모두 예레미야를 만날 때에 기쁨이 있으리라. 하나님이 에스겔을 부르신 때는 여호야긴 왕은 포로로 잡혀가고 유다는 시드기야가 다스리고 있던 때였다. 유다는 강퍅하여 하나님을 거역하여 망하기 직전에 와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큰 것이어서 에스겔을 보내신 것이다. 에스겔은 힘을 다하여 이스라엘의 심판과 회복과 위로를 전하며 그의 생애를 보냈다. 그 외에도 다니엘, 호세아, 요엘, 요나 등 수많은 주님의 종들이 전도자의 길을 힘을 다하여 수행하여 지금 하늘에서 자기들의 복을 누리고 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베드로를 부르셨다. 그리고 즉시 그를 부르신 목적을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주님은 즉시 순종하는 베드로를 연단하셔서 큰 전도자로 쓰셨다. 이때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랐던 베드로는 후에 회고하기를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다(벧후 1:1). 베드로의 선택은 옳았다. 그는 베드로후서를 마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있음을 본다. 주님의 제자들과 수를 알 수 없는 선진들이 복음 때문에 살고 복음 때문에 죽어갔다. 그들은 주님께 부름을 받고 주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태양처럼 뜨겁게 살다 갔다. 자기 몸을 불태우는 태양처럼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자신의 삶이 없을 뿐 아니라 땅에서는 나그네와 행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살다 갔다. 오, 형제여, 복음을 위한 삶, 전도자의 길,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계시록에 나오는 촛대처럼 당신의 인생을 녹여 태우므로 복음의 횃불을 밝히고 싶지 않은가? 하나님은 당신의 입이 필요하다. 당신의 손이 필요하다. 당신의 시간, 물질이 복음전파를 위해서 필요하다. 구원받은 성도는 누구나 전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도가 아니면 우리가 이 땅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한 영혼의 가치는 크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 :10). 만약 당신이 5,000만원의 돈을 어떤 사람에게 떼였다고 생각하여 보자. 자취를 감춘 그 사람을 찾을 길이 없어 애가 타고 있었다. 수소문하고 알아본 결과 그는 강원도 산간 어디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그는 그곳에 숨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 정보를 입수한 당신은 그곳을 즉시 찾아갈 것이다. 아무리 바쁘고 중요한 일이 있어도 그를 먼저 찾아 나설 것이다. 아마 사람들 대부분은 필자의 이 말에 동의할 줄 믿는다. 당신에게 있어 5,000만원의 돈이 그토록 중요하여 만사를 제쳐두고 찾아 나선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하늘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한 영혼을 찾아 이 세상에 오셨다면 그 한 영혼은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것은 한 영혼의 가치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도 천하만국의 부귀영화와 좋은 것을 다 뿌리치시고 한 영혼을 건지는 일에만 몰두하셨다(마 4:1-11). 억지로 왕 삼고자 할 때에도 거절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6:15). 한 영혼을 건지기 위함이 아닌가? 당신이 5,000만원 때문에 직장을 휴직하고 찾아 나선다면, 왕의 자리를 버리고 당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 영혼의 가치는 어떤 직책이나 어떤 물질의 가치와도 비교할 수 없다. 실제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하셨다(마 16:26). 주님은 이 지구를 회복시켜 살기 좋은 낙원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 세상의 제도를 바꾸거나 나라를 개혁시켜 발전시키기 위하여 오신 것도 아니다. 오직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는 영혼, 즉 물질적 가치를 온전히 초월한 영혼의 가치 때문이다. 바울은 구속의 진리를 상업적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6:20, 7:23).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이 값을 치르시고 사셨다. 모든 물건의 가치는 값으로 정해진다. 500원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은 500원의 가치를 지닌다. 그 값이 정상적이라면 그 가치는 그 이상을 결코 넘지 못한다. 물건 중에는 5,000만원, 또는 50억을 주어야 하는 것도 많다. 그 가격은 그 물건의 가치이다. 그렇다면 한 영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치르신 대가는 무엇인가? 그것은 물질로써 대체될 수 없는 것이었다(시 49:7-8). 이 일을 생각할 때 다음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한 영혼을 건지기 위하여 치르신 값은 자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비참하게 죽게 하신 것이었다. 독자도 생각해보시라. 우리가 그만한 대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초라하고 하루살이 같은 가치 없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한 영혼의 가치를 자신의 외아들을 희생시킬 만큼 크게 보셨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말씀 안에서 생각해보자. 첫째, 한 영혼을 귀히 보시고 아들을 주신 까닭은, 그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투자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평생 모은 재산 중 절반을 어느 학교 재단에 기부하였다고 하자. 여러분이 그 학교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아니하겠는가? 그 학교가 잘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몸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만드심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한다. 하나님의 생기가 인간에게 불어 넣어져서 인간이 만들어졌으니 물질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동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람은 존귀하다. 그러나 존귀한 가치를 깨달을 때 존귀한 것이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둘째, 영혼의 가치를 존귀하게 보시고 아들을 주신 까닭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이다. 아비가 자식을 귀하게 여기듯 하나님이 한 영혼을 귀히 보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3). 부모가 자식을 잊지 못하고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어떠하시겠는가(사 49:15). 창세 이래로 하나님은 사람을 귀히 보셨고 사랑하셨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까닭이다. 셋째, 한 영혼을 귀히 보시고 아들을 주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불신 영혼이 가는 지옥이 너무도 끔찍한 까닭이다. 말이야 쉽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속에서 영원히 죽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보통 생각할 문제인가? 독자들은 이 글을 읽는 순간 놀라야 한다. 심장이 뛰어야 하고 충격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실체이다. 정직한 반응이다. 만약 당신의 아들이 범죄하여 사형선고를 받게 될 상황이라면 당신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리려고 노력할 것이다. 몸부림을 칠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살릴 방법을 찾으려 할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을 닮은 존귀한 인간이 멸망의 지옥에 영원히 던져지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는가! 얼마나 고통스러우시겠는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선뜻 내어주실 수밖에 없었음이 당연하지 않은가! 한 영혼을 위하여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구원하셨지 않은가! 이러한 사랑을 받은 우리가 죽음을 각오하고 전도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도가 전도하는 것은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고 상 받을 만한 일도 아니고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내가 받은 사랑을 나누는 일이요,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일인 것이다. 주님이 벌레 같은 나의 영혼의 가치를 이토록 크게 보아주셨다면 내가 다른 영혼의 가치를 무시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전도하지 않는다면 한 영혼의 가치의 귀중함을 잊어버렸거나 무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선진들의 헌신적인 삶은 한 영혼의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였다. 독자여, 당신의 영혼이 가치를 깨달은 다른 전도자에 의해서 건져진 것과 같이, 당신도 다른 영혼의 구원을 위한 해산의 수고를 시작하지 않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일은 전도하는 일이다. 지옥 가는 사람을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 필자는 수없이 많은 날 동안 지옥 문제를 생각해오고 있는바, 어떤 경우를 말하더라도 사람이 지옥 가는 일을 막지 않을 수 없다. 지옥을 증거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 단순히 기독교 종교를 확장하는 일일 수는 없다. 이것은 생명의 생(生)과 사(死)의 문제요 인간의 지능으로 상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지옥의 고통을 면하게 하는 일인 것이다. 필자는 사석에서 가끔 여담으로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만약 대통령과 독대할 기회가 있다면,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밖에 없다. 어서 ‘지옥을 면하시오’ 하는 말이다. 이 말 이외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세상의 어떤 일이 지옥을 피하는 일보다 중하겠는가?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핑계가 있다. 그들은 그 핑계로 믿지 않는 자신을 정당화시키려 한다. 우리는 전도 전략상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때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말하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기에는 너무 급하다. 그들의 심장은 계속 뛰고 있으며 그들의 육체는 종점을 향하여 힘차게 달음질하고 있다. 그리고 그 종점에는 끔찍한 지옥이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하고 달음질하고 있다. 그들의 생명은 존귀하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시간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을 모두 낭비하고 있다. 시간과 기회의 중요성은 지옥에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의 눈물은 후회와 통곡의 부산물일 것이다. 건강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은 죄악을 행하는데, 쾌락을 즐기는데 그들의 건강을 소모하고 있다.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듣는 것을 귀찮게 여기고 있다. 그들은 불쌍한 운명에 처해 있다. 그들은 그들의 지식과 능력과 시간 등, 모든 중요한 것을 다 낭비하고 지옥에서 울게 될 것이다. 그들을 이대로 내버려 두기에는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다. 삶은 그들의 것이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삶을 사단에 종노릇하며 탕진하여 결국 자기 영혼을 망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 일에 대해서 간증하면서 고통스러운 심령을 털어놓고 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롬 9:2). 바울은 천국의 아름다움과 지옥의 끔찍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눈을 감으면 자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지옥에서 고통을 호소하며 울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한, 눈을 뜨면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람이 지옥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현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와 같은 사실 앞에서 그의 심장은 터질 듯 끓고 있었으며 그의 눈은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고통과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오직 생각나는 것은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불쌍함뿐이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근심이었다. 사도 바울의 그치지 않는 고통이었다. 이 양심적인 고통이 사도 바울을 늘 짓눌렀다. 그는 이 거룩한 고통으로 인하여 평생을 복음을 전했다. 미친 듯이 복음을 전했다. 그는 지옥의 적나라한 모습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자로서 사람들에게 지옥을 경고하는 일 외에 아무것도 중요한 일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면 그는 어디든지 갈 수 있었고 또한 갔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면 무슨 회생이든 머뭇거리지 않았다. 마치 불난 집에서 미처 나오지 못한 자식을 살리기 위해 실성한 사람처럼 불속으로 뛰어들되 위험을 전혀 생각지 않고 뛰어드는 어미와 같았다. 오로지 아기를 살리려는 생각 외에 아무 생각도 없는 어미처럼…. 이것이 바울의 생애였다. 다음 말씀이 바울의 심령을 더 잘 증거한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롬 9:3). 바울의 골육 친척들이 유대교를 고집하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못박은 유대인들처럼 여전히 이단 취급하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의 당할 지옥 형벌의 끔찍함을 알기에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의 구원을 원했다. 보통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간증이 아닌가? 전도자로서의 바울은 이토록 처절하였다. 그는 평생을 육신으로 당하는 고통과 양심적인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금일의 수많은 기독인이 바울을 사랑하고 존경한다고는 하나 바울의 이 심령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필자는 한탄하는 마음이 있다. 예수님의 고통은 어떠하셨겠는가? “이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 16: 21).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하는 말씀으로 주님은 필연적인 것을 말씀하셨다. 이 일은 꼭 이루어져야만 했으며 예수님은 이 길을 꼭 통과하여야만 하셨다. 왜냐하면, 이것이 사람을 지옥에서 건지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를 흔드는 놀라운 진리를 알 리가 없는 제자 베드로는 “그리 마옵소서” 하고 말리지 않았던가! 그 결과 그는 “사단아” 하는 책망을 듣고 말았다. 베드로의 생애에 가장 수치스러웠던 순간 중 하나였을 것이다. 영적인 의미를 깊이 깨닫지 못하고 육신으로 말하는 베드로의 행동은 사단의 생각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오, 성도들이여,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옥 가는 영혼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예수님의 생애가 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 바울의 삶이 증명하고 있다. 필리핀, 캄보디아, 태국에서 독충과 싸우며, 고독을 극복하며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증인이다.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람을 지옥에 가도록 그대로 버려둘 수는 없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삶이 복음을 위한 고난으로 바뀌기 바란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기 바란다. 이 일이 우리가 호흡하는 유일한 이유이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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