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복음과 진리를 전하는전도 문서 선교회
제품상세보기줄거리 |
1장 서 론 “분파주의”(Sectarianism)는 죄입니다. 아주 심각한 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명백히 정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것을 마땅히 판단해야 할 만큼 판단하지 않습니다. 대다수 그리스도인이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거나, 변명의 여지가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일단 그것이 죄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면, 그 세 가지 표현 모두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분파주의는 기독교와 대립되는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성령 안에서 사랑과 희락과 평강”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롬 14:17). 분파주의는 지난 역사에 볼 수 있었던 증오와 슬픔과 분쟁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 신자들의 교제를 방해하거나 파괴해왔으며, 당연히 함께 조화를 이루며 동행했어야 하는 이들을 갈라놓았습니다. 그것이 책임져야 할 죄는 무수히 많으며, 그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에 끼친 불명예는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그것을 거부하고 정죄했어야 할 장본인들이 그것을 옹호했으며, 지금도 그것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이 분파주의의 죄(罪)만큼 보호받고 널리 선전되는 죄는 없습니다. 이 죄만큼 수많은 명목상의 교인들만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랑거리로 떠받쳐지는 죄는 없습니다. 이 죄만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참된 사랑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일에의 참된 동역을 파괴하는 데 더 책임 있는 죄는 없습니다. 이 죄만큼 구원받지 못한 이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데 방해가 되는 죄는 없습니다. 분파주의는 성령이 아닌 육신의 일이며, 그런 까닭에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대적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근절된 듯한 곳에서 다시 새롭게 돋아나는 악한 뿌리이며, 육신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성령에게는 그만큼 낯선 것입니다. 지금은 그것을 향해 전쟁을 선포할 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가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분파주의를 받아들이는 잘못을 쉽게 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분파주의의 과거 역사였습니다. 육신이 육신을 대적하여 싸웠으나 더욱 강한 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신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다스리도록 허락한다면 분파주의의 견고한 성도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모든 진정한 영적 부흥은 인간의 실패를 인정하고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는 데로 돌이킨 결과였습니다. 분파주의와 관련된 실패는 지금보다 더 증거가 많은 때는 없었으며, 회복의 길로 나가는 첫걸음은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고 자백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적부에 등록한 교인들은 이런 문제에 별반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들(골 1:6), 그 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었다는 성령의 증거가 있는 자들은(롬 8:16; 갈 3:26)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가 되어 교제와 증거에 있어서 나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뜻임을 이해할 것입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도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우리 주님의 기도만큼 신자의 마음에 친숙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아버지께 기도로 드려진 하나님 아들의 마음의 생각과 바램에 대한 계시보다 더 거룩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는 거룩한 말씀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은 현 시대의 분열된 기독교의 상태에 결코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요 17:21).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우리의 모든 행동과 태도가 이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그분의 마음의 생각 및 바램과 일치될 것을 요구합니다. 신약성경의 서신들에 이르면, 우리는 즉시, 1세기 그리스도인들 간에 분열이 존재했다는 슬픈 사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아울러 그 사실로 인해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그런 상태의 심각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명백히 새겨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파” (Sects)는 육신의 일로 묘사된 가증한 것들에 포함되었으며(갈 5:20), 또 고린도전서 초반은 분파주의의 악(惡)에 대해 많은 말을 합니다. 그 부분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사도 바울의 충성스러운 수고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충성스럽게 복음을 전파했으며, 많은 소중한 영혼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왔습니다. 남녀노소와 유대인과 이방인과 죄에 찌든 사람과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회심의 기적을 체험하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침례를 받고 교회의 교제에 참여했으며, 고린도의 부패하고 죄악된 상황 속에서 지역교회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고귀한 이름으로 모였습니다. 이런 교회는 제 기능을 적절히 수행하는 한 그 처한 곳에서 크나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된 삶은 그 자체가 증거가 되었습니다. 죄악에 사로잡혀 살던 죄인들이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세상에게 또 하나의 메시지가 주어져야 했으며, 그 메시지가 제대로 선포되려면 관계된 모든 이들이 한 마음으로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성도들은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갈래로 분열되었습니다. 세상에 한 몸된 증거를 보여주는 대신 그들은 육신적인 견해와 기호를 따라 서로 다투고 파를 형성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증거가 심각히 훼손당했고 사도 바울의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올바른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행동의 죄악됨을 인식하지 못할 리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을 받아 고린도에 보내는 첫 번째 서신에서 분파주의의 가증한 죄를 지적하는 원리적인 가르침을 베풀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교파처럼 몸에서 분리되어 각기 다른 이름으로 모이는 무리들이 고린도에 있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됩니다. 상황은 아직 그런 상태까지 가지 않았지만, 육신적인 사람들과, 상황이 무르익으면 조만간 공공연한 분열로 나아갈 분당을 짓기 위해 어떤 이들의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성향 속에 그 악의 뿌리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분파의식을 만들어내는 자들의 세속성을 정죄하되 그 이름이 그런 식으로 사용되고 있는 개개인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그렇게 했다면, 분명 그가 관계된 사람들 개개인을 시샘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을 것입니다. 그 대신 그는 지혜롭게도 그 일을 그 자신과 그의 동역자인 아볼로와 게바에게로 돌렸는데, 이는 그 분열의 악을 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정죄하게 해주었습니다. 4장 6절에서, 그는 아무리 가치 있는 이름이든 사람의 이름을, 인간 지도자 주변에 모여들어 성도들 사이를 나눌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 자신과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어떤 이름이든 사람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조차도 어느 파의 이름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데 이는 그것이 어느 분파가 아니라 성도 전체에게 속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사용되는 여러 분파적인 명칭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바울 당시에 육신적인 것으로 비난받던 것이 이 20세기에는 영적인 것으로 환영받을 수 있을까요? 고린도 교회에는 즉각적이고도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할 여러 심각한 죄가 존재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그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서신에서 가장 먼저 다룬 것이 분파주의의 악입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분파주의의 죄가 고린도 성도들의 육신적인 상태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주었습니다. 그들은 육신적이었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를 그분의 모든 백성의 모임의 중심으로 바라보는 대신 인간 지도자를 좇고 그 주변에 모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참된 그리스도의 종들은 교회에게 주신 선물이며, 또 그런 자들로서 마땅히 존경받아야 하지만,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훌륭한 자질을 갖췄을지라도 그들은 서로 비교되거나 성도들 사이에 경쟁하는 무리의 지도자 자리에 놓여서는 안 된다고 그들에게 권면했습니다. 분파주의의 죄는 요한삼서에서 다시 예증되었습니다. 이 서신은 가이오라는 매우 인품이 뛰어나고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잘 알려진 형제에게 보내졌습니다. 가이오는 매우 비정상적인 모습이 존재하는 어느 지역교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는 디오드레베라는 자칭 형제가 있었는데, 불명예스럽게도 그는 형제들 가운데 으뜸 되기를 좋아했다고 성경에 영구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한 자리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디오드레베는 다른 형제들이 교회에서 합당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도 요한과 그 동료들조차도 단순히 그 교회를 방문하려 했다가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요한은 앞서 방문 의도를 편지로 써서 알렸으나 디오드레베는 요한 일행을 맞이할 뜻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그 주님의 종들을 영접하는데 호의적인 뜻을 보이자 디오드레베는 가차 없이 그들을 교회에서 내쫓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그 자신의 교회였습니다. 그는 교회를 자신이 다스리고자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기독교 역사에 종종 나타난 완고한 성직자상의 전형입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 간에 분열의 존재를 말해주는 표현의 첫 사용을 보게 됩니다. 요한은 더 이상 어느 곳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편지한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대신 그곳에 있는 신실한 형제에게 편지한다고 말하면서, 디오드레베를 좇는 자들을 가리켜 “저희”라고 했습니다. 디오드레베는 “너희 중”이 아니라 “저희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했습니다.” 이미 디오드레베를 좇는 무리가 있었으며, 그런 면에서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다음 경고가 성취된 것입니다.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행 20:30). 분파주의의 역사를 보면, 성경이 미리 경고했듯이, 그 악은 주로 인간 지도자를 좇고 인간의 이름을 사용한데 기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교회에 대한 참된 영적인 개념과 교회에 관한 영감된 가르침들을 포기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교회의 영적인 문제들에 대한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권위서인 성경의 증거가 제처지고 다른 인간적인 권위가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런 결과, 신자들의 영적인 생활과 그들의 세상에서의 간증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사도들의 글에 나타난 주님의 뜻에 관한 계시는 매우 완전하고도 알기 쉽습니다. 그 계시는 우리가 기독교 시대가 다할 때까지 붙잡고 순종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 원칙에서 떠난 후 다시 영적으로 회복되려면 반드시 하나님 말씀의 원리와 규범으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이어지는 장들에서 우리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주적인 교회와 지역교회의 중요한 특징과 역할과 실제 모습에 관해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사도시대에 존재했던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며, 그런 다음에, 온갖 유해한 악을 내포한 분파주의를 만들어낸, 사도들의 본으로부터 떠난 역사를 간략히 개괄하여 분파주의의 원인을 알아내고 그 처방책을 발견해내는 것입니다. |
서평 |
“분파주의”(Sectarianism)는 죄입니다. 아주 심각한 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명백히 정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것을 마땅히 판단해야 할 만큼 판단하지 않습니다. 대다수 그리스도인이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거나, 변명의 여지가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일단 그것이 죄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면, 그 세 가지 표현 모두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
목차 |
1장 서론 ………………………………………………………………5 2장 참 교회 ………………………………………………………… 13 3장 지역교회 ……………………………………………………… 19 4장 침례와 영접 …………………………………………………… 24 5장 신적인 이름-그리스도인 …………………………………27 6장 말씀사역 ………………………………………………………32 7장 목양의 책임 …………………………………………………… 35 8장 주의 만찬과 예배 ……………………………………………39 9장 치리와 징계…………………………………………………… 42 10장 카톨릭(Catholic) 교회라는 개념……………………………47 11장 카톨릭 교회의 발전 …………………………………………52 12장 로마 카톨릭 교회 ……………………………………………59 13장 희랍 카톨릭 교회(그리스 정교회)……………………… 65 14장 중세의 “교회” ………………………………………………68 15장 종교개혁과 루터교 ………………………………………… 72 16장 개혁교회와 장로교 …………………………………………77 17장 영국 성공회 …………………………………………………81 18장 청교도와 독립교회와 회중교회………………………… 85 19장 퀘이커교 혹은 동우회……………………………………… 88 20장 감리교…………………………………………………………92 21장 침례교회와 메노나이트 파…………………………………96 22장 오순절 교회 ………………………………………………… 103 23장 구세군…………………………………………………………107 24장 그리스도인의 모임(Christian Assemblies) ……………112 25장 교제권의 범위 ………………………………………………121 26장 “요긴한 진리”(Needed Truth)파 교회들………………… 130 27장 분파주의의 원인……………………………………………135 28장 열린 문……………………………………………………… 143 참고 문헌 ………………………………………………………… 155 |
약력 |
|
리뷰 |
|
상세설명 |
1장 서 론 “분파주의”(Sectarianism)는 죄입니다. 아주 심각한 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명백히 정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것을 마땅히 판단해야 할 만큼 판단하지 않습니다. 대다수 그리스도인이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거나, 변명의 여지가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일단 그것이 죄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면, 그 세 가지 표현 모두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분파주의는 기독교와 대립되는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성령 안에서 사랑과 희락과 평강”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롬 14:17). 분파주의는 지난 역사에 볼 수 있었던 증오와 슬픔과 분쟁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 신자들의 교제를 방해하거나 파괴해왔으며, 당연히 함께 조화를 이루며 동행했어야 하는 이들을 갈라놓았습니다. 그것이 책임져야 할 죄는 무수히 많으며, 그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에 끼친 불명예는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그것을 거부하고 정죄했어야 할 장본인들이 그것을 옹호했으며, 지금도 그것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이 분파주의의 죄(罪)만큼 보호받고 널리 선전되는 죄는 없습니다. 이 죄만큼 수많은 명목상의 교인들만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랑거리로 떠받쳐지는 죄는 없습니다. 이 죄만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참된 사랑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일에의 참된 동역을 파괴하는 데 더 책임 있는 죄는 없습니다. 이 죄만큼 구원받지 못한 이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데 방해가 되는 죄는 없습니다. 분파주의는 성령이 아닌 육신의 일이며, 그런 까닭에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대적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근절된 듯한 곳에서 다시 새롭게 돋아나는 악한 뿌리이며, 육신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성령에게는 그만큼 낯선 것입니다. 지금은 그것을 향해 전쟁을 선포할 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가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분파주의를 받아들이는 잘못을 쉽게 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분파주의의 과거 역사였습니다. 육신이 육신을 대적하여 싸웠으나 더욱 강한 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신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다스리도록 허락한다면 분파주의의 견고한 성도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모든 진정한 영적 부흥은 인간의 실패를 인정하고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는 데로 돌이킨 결과였습니다. 분파주의와 관련된 실패는 지금보다 더 증거가 많은 때는 없었으며, 회복의 길로 나가는 첫걸음은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고 자백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적부에 등록한 교인들은 이런 문제에 별반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들(골 1:6), 그 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었다는 성령의 증거가 있는 자들은(롬 8:16; 갈 3:26)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가 되어 교제와 증거에 있어서 나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뜻임을 이해할 것입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도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우리 주님의 기도만큼 신자의 마음에 친숙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아버지께 기도로 드려진 하나님 아들의 마음의 생각과 바램에 대한 계시보다 더 거룩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는 거룩한 말씀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은 현 시대의 분열된 기독교의 상태에 결코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요 17:21).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우리의 모든 행동과 태도가 이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그분의 마음의 생각 및 바램과 일치될 것을 요구합니다. 신약성경의 서신들에 이르면, 우리는 즉시, 1세기 그리스도인들 간에 분열이 존재했다는 슬픈 사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아울러 그 사실로 인해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그런 상태의 심각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명백히 새겨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파” (Sects)는 육신의 일로 묘사된 가증한 것들에 포함되었으며(갈 5:20), 또 고린도전서 초반은 분파주의의 악(惡)에 대해 많은 말을 합니다. 그 부분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사도 바울의 충성스러운 수고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충성스럽게 복음을 전파했으며, 많은 소중한 영혼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왔습니다. 남녀노소와 유대인과 이방인과 죄에 찌든 사람과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회심의 기적을 체험하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침례를 받고 교회의 교제에 참여했으며, 고린도의 부패하고 죄악된 상황 속에서 지역교회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고귀한 이름으로 모였습니다. 이런 교회는 제 기능을 적절히 수행하는 한 그 처한 곳에서 크나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된 삶은 그 자체가 증거가 되었습니다. 죄악에 사로잡혀 살던 죄인들이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세상에게 또 하나의 메시지가 주어져야 했으며, 그 메시지가 제대로 선포되려면 관계된 모든 이들이 한 마음으로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성도들은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갈래로 분열되었습니다. 세상에 한 몸된 증거를 보여주는 대신 그들은 육신적인 견해와 기호를 따라 서로 다투고 파를 형성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증거가 심각히 훼손당했고 사도 바울의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올바른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행동의 죄악됨을 인식하지 못할 리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을 받아 고린도에 보내는 첫 번째 서신에서 분파주의의 가증한 죄를 지적하는 원리적인 가르침을 베풀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교파처럼 몸에서 분리되어 각기 다른 이름으로 모이는 무리들이 고린도에 있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됩니다. 상황은 아직 그런 상태까지 가지 않았지만, 육신적인 사람들과, 상황이 무르익으면 조만간 공공연한 분열로 나아갈 분당을 짓기 위해 어떤 이들의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성향 속에 그 악의 뿌리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분파의식을 만들어내는 자들의 세속성을 정죄하되 그 이름이 그런 식으로 사용되고 있는 개개인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그렇게 했다면, 분명 그가 관계된 사람들 개개인을 시샘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을 것입니다. 그 대신 그는 지혜롭게도 그 일을 그 자신과 그의 동역자인 아볼로와 게바에게로 돌렸는데, 이는 그 분열의 악을 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정죄하게 해주었습니다. 4장 6절에서, 그는 아무리 가치 있는 이름이든 사람의 이름을, 인간 지도자 주변에 모여들어 성도들 사이를 나눌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 자신과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어떤 이름이든 사람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조차도 어느 파의 이름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데 이는 그것이 어느 분파가 아니라 성도 전체에게 속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사용되는 여러 분파적인 명칭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바울 당시에 육신적인 것으로 비난받던 것이 이 20세기에는 영적인 것으로 환영받을 수 있을까요? 고린도 교회에는 즉각적이고도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할 여러 심각한 죄가 존재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그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서신에서 가장 먼저 다룬 것이 분파주의의 악입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분파주의의 죄가 고린도 성도들의 육신적인 상태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주었습니다. 그들은 육신적이었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를 그분의 모든 백성의 모임의 중심으로 바라보는 대신 인간 지도자를 좇고 그 주변에 모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참된 그리스도의 종들은 교회에게 주신 선물이며, 또 그런 자들로서 마땅히 존경받아야 하지만,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훌륭한 자질을 갖췄을지라도 그들은 서로 비교되거나 성도들 사이에 경쟁하는 무리의 지도자 자리에 놓여서는 안 된다고 그들에게 권면했습니다. 분파주의의 죄는 요한삼서에서 다시 예증되었습니다. 이 서신은 가이오라는 매우 인품이 뛰어나고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잘 알려진 형제에게 보내졌습니다. 가이오는 매우 비정상적인 모습이 존재하는 어느 지역교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는 디오드레베라는 자칭 형제가 있었는데, 불명예스럽게도 그는 형제들 가운데 으뜸 되기를 좋아했다고 성경에 영구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한 자리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디오드레베는 다른 형제들이 교회에서 합당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도 요한과 그 동료들조차도 단순히 그 교회를 방문하려 했다가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요한은 앞서 방문 의도를 편지로 써서 알렸으나 디오드레베는 요한 일행을 맞이할 뜻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그 주님의 종들을 영접하는데 호의적인 뜻을 보이자 디오드레베는 가차 없이 그들을 교회에서 내쫓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그 자신의 교회였습니다. 그는 교회를 자신이 다스리고자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기독교 역사에 종종 나타난 완고한 성직자상의 전형입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 간에 분열의 존재를 말해주는 표현의 첫 사용을 보게 됩니다. 요한은 더 이상 어느 곳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편지한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대신 그곳에 있는 신실한 형제에게 편지한다고 말하면서, 디오드레베를 좇는 자들을 가리켜 “저희”라고 했습니다. 디오드레베는 “너희 중”이 아니라 “저희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했습니다.” 이미 디오드레베를 좇는 무리가 있었으며, 그런 면에서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다음 경고가 성취된 것입니다.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행 20:30). 분파주의의 역사를 보면, 성경이 미리 경고했듯이, 그 악은 주로 인간 지도자를 좇고 인간의 이름을 사용한데 기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교회에 대한 참된 영적인 개념과 교회에 관한 영감된 가르침들을 포기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교회의 영적인 문제들에 대한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권위서인 성경의 증거가 제처지고 다른 인간적인 권위가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런 결과, 신자들의 영적인 생활과 그들의 세상에서의 간증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사도들의 글에 나타난 주님의 뜻에 관한 계시는 매우 완전하고도 알기 쉽습니다. 그 계시는 우리가 기독교 시대가 다할 때까지 붙잡고 순종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 원칙에서 떠난 후 다시 영적으로 회복되려면 반드시 하나님 말씀의 원리와 규범으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이어지는 장들에서 우리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주적인 교회와 지역교회의 중요한 특징과 역할과 실제 모습에 관해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사도시대에 존재했던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며, 그런 다음에, 온갖 유해한 악을 내포한 분파주의를 만들어낸, 사도들의 본으로부터 떠난 역사를 간략히 개괄하여 분파주의의 원인을 알아내고 그 처방책을 발견해내는 것입니다.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상품정보제공 고시 |
줄거리 |
1장 서 론 “분파주의”(Sectarianism)는 죄입니다. 아주 심각한 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명백히 정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것을 마땅히 판단해야 할 만큼 판단하지 않습니다. 대다수 그리스도인이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거나, 변명의 여지가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일단 그것이 죄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면, 그 세 가지 표현 모두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분파주의는 기독교와 대립되는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성령 안에서 사랑과 희락과 평강”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롬 14:17). 분파주의는 지난 역사에 볼 수 있었던 증오와 슬픔과 분쟁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 신자들의 교제를 방해하거나 파괴해왔으며, 당연히 함께 조화를 이루며 동행했어야 하는 이들을 갈라놓았습니다. 그것이 책임져야 할 죄는 무수히 많으며, 그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에 끼친 불명예는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그것을 거부하고 정죄했어야 할 장본인들이 그것을 옹호했으며, 지금도 그것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이 분파주의의 죄(罪)만큼 보호받고 널리 선전되는 죄는 없습니다. 이 죄만큼 수많은 명목상의 교인들만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랑거리로 떠받쳐지는 죄는 없습니다. 이 죄만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참된 사랑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일에의 참된 동역을 파괴하는 데 더 책임 있는 죄는 없습니다. 이 죄만큼 구원받지 못한 이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데 방해가 되는 죄는 없습니다. 분파주의는 성령이 아닌 육신의 일이며, 그런 까닭에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대적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근절된 듯한 곳에서 다시 새롭게 돋아나는 악한 뿌리이며, 육신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성령에게는 그만큼 낯선 것입니다. 지금은 그것을 향해 전쟁을 선포할 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가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분파주의를 받아들이는 잘못을 쉽게 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분파주의의 과거 역사였습니다. 육신이 육신을 대적하여 싸웠으나 더욱 강한 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신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다스리도록 허락한다면 분파주의의 견고한 성도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모든 진정한 영적 부흥은 인간의 실패를 인정하고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는 데로 돌이킨 결과였습니다. 분파주의와 관련된 실패는 지금보다 더 증거가 많은 때는 없었으며, 회복의 길로 나가는 첫걸음은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고 자백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적부에 등록한 교인들은 이런 문제에 별반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들(골 1:6), 그 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었다는 성령의 증거가 있는 자들은(롬 8:16; 갈 3:26)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가 되어 교제와 증거에 있어서 나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뜻임을 이해할 것입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도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우리 주님의 기도만큼 신자의 마음에 친숙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아버지께 기도로 드려진 하나님 아들의 마음의 생각과 바램에 대한 계시보다 더 거룩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는 거룩한 말씀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은 현 시대의 분열된 기독교의 상태에 결코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요 17:21).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우리의 모든 행동과 태도가 이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그분의 마음의 생각 및 바램과 일치될 것을 요구합니다. 신약성경의 서신들에 이르면, 우리는 즉시, 1세기 그리스도인들 간에 분열이 존재했다는 슬픈 사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아울러 그 사실로 인해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그런 상태의 심각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명백히 새겨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파” (Sects)는 육신의 일로 묘사된 가증한 것들에 포함되었으며(갈 5:20), 또 고린도전서 초반은 분파주의의 악(惡)에 대해 많은 말을 합니다. 그 부분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사도 바울의 충성스러운 수고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충성스럽게 복음을 전파했으며, 많은 소중한 영혼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왔습니다. 남녀노소와 유대인과 이방인과 죄에 찌든 사람과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회심의 기적을 체험하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침례를 받고 교회의 교제에 참여했으며, 고린도의 부패하고 죄악된 상황 속에서 지역교회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고귀한 이름으로 모였습니다. 이런 교회는 제 기능을 적절히 수행하는 한 그 처한 곳에서 크나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된 삶은 그 자체가 증거가 되었습니다. 죄악에 사로잡혀 살던 죄인들이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세상에게 또 하나의 메시지가 주어져야 했으며, 그 메시지가 제대로 선포되려면 관계된 모든 이들이 한 마음으로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성도들은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갈래로 분열되었습니다. 세상에 한 몸된 증거를 보여주는 대신 그들은 육신적인 견해와 기호를 따라 서로 다투고 파를 형성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증거가 심각히 훼손당했고 사도 바울의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올바른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행동의 죄악됨을 인식하지 못할 리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을 받아 고린도에 보내는 첫 번째 서신에서 분파주의의 가증한 죄를 지적하는 원리적인 가르침을 베풀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교파처럼 몸에서 분리되어 각기 다른 이름으로 모이는 무리들이 고린도에 있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됩니다. 상황은 아직 그런 상태까지 가지 않았지만, 육신적인 사람들과, 상황이 무르익으면 조만간 공공연한 분열로 나아갈 분당을 짓기 위해 어떤 이들의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성향 속에 그 악의 뿌리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분파의식을 만들어내는 자들의 세속성을 정죄하되 그 이름이 그런 식으로 사용되고 있는 개개인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그렇게 했다면, 분명 그가 관계된 사람들 개개인을 시샘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을 것입니다. 그 대신 그는 지혜롭게도 그 일을 그 자신과 그의 동역자인 아볼로와 게바에게로 돌렸는데, 이는 그 분열의 악을 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정죄하게 해주었습니다. 4장 6절에서, 그는 아무리 가치 있는 이름이든 사람의 이름을, 인간 지도자 주변에 모여들어 성도들 사이를 나눌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 자신과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어떤 이름이든 사람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조차도 어느 파의 이름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데 이는 그것이 어느 분파가 아니라 성도 전체에게 속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사용되는 여러 분파적인 명칭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바울 당시에 육신적인 것으로 비난받던 것이 이 20세기에는 영적인 것으로 환영받을 수 있을까요? 고린도 교회에는 즉각적이고도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할 여러 심각한 죄가 존재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그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서신에서 가장 먼저 다룬 것이 분파주의의 악입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분파주의의 죄가 고린도 성도들의 육신적인 상태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주었습니다. 그들은 육신적이었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를 그분의 모든 백성의 모임의 중심으로 바라보는 대신 인간 지도자를 좇고 그 주변에 모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참된 그리스도의 종들은 교회에게 주신 선물이며, 또 그런 자들로서 마땅히 존경받아야 하지만,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훌륭한 자질을 갖췄을지라도 그들은 서로 비교되거나 성도들 사이에 경쟁하는 무리의 지도자 자리에 놓여서는 안 된다고 그들에게 권면했습니다. 분파주의의 죄는 요한삼서에서 다시 예증되었습니다. 이 서신은 가이오라는 매우 인품이 뛰어나고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잘 알려진 형제에게 보내졌습니다. 가이오는 매우 비정상적인 모습이 존재하는 어느 지역교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는 디오드레베라는 자칭 형제가 있었는데, 불명예스럽게도 그는 형제들 가운데 으뜸 되기를 좋아했다고 성경에 영구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한 자리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디오드레베는 다른 형제들이 교회에서 합당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도 요한과 그 동료들조차도 단순히 그 교회를 방문하려 했다가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요한은 앞서 방문 의도를 편지로 써서 알렸으나 디오드레베는 요한 일행을 맞이할 뜻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그 주님의 종들을 영접하는데 호의적인 뜻을 보이자 디오드레베는 가차 없이 그들을 교회에서 내쫓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그 자신의 교회였습니다. 그는 교회를 자신이 다스리고자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기독교 역사에 종종 나타난 완고한 성직자상의 전형입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 간에 분열의 존재를 말해주는 표현의 첫 사용을 보게 됩니다. 요한은 더 이상 어느 곳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편지한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대신 그곳에 있는 신실한 형제에게 편지한다고 말하면서, 디오드레베를 좇는 자들을 가리켜 “저희”라고 했습니다. 디오드레베는 “너희 중”이 아니라 “저희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했습니다.” 이미 디오드레베를 좇는 무리가 있었으며, 그런 면에서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다음 경고가 성취된 것입니다.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행 20:30). 분파주의의 역사를 보면, 성경이 미리 경고했듯이, 그 악은 주로 인간 지도자를 좇고 인간의 이름을 사용한데 기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교회에 대한 참된 영적인 개념과 교회에 관한 영감된 가르침들을 포기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교회의 영적인 문제들에 대한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권위서인 성경의 증거가 제처지고 다른 인간적인 권위가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런 결과, 신자들의 영적인 생활과 그들의 세상에서의 간증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사도들의 글에 나타난 주님의 뜻에 관한 계시는 매우 완전하고도 알기 쉽습니다. 그 계시는 우리가 기독교 시대가 다할 때까지 붙잡고 순종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 원칙에서 떠난 후 다시 영적으로 회복되려면 반드시 하나님 말씀의 원리와 규범으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이어지는 장들에서 우리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주적인 교회와 지역교회의 중요한 특징과 역할과 실제 모습에 관해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사도시대에 존재했던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며, 그런 다음에, 온갖 유해한 악을 내포한 분파주의를 만들어낸, 사도들의 본으로부터 떠난 역사를 간략히 개괄하여 분파주의의 원인을 알아내고 그 처방책을 발견해내는 것입니다. |
서평 |
“분파주의”(Sectarianism)는 죄입니다. 아주 심각한 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명백히 정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것을 마땅히 판단해야 할 만큼 판단하지 않습니다. 대다수 그리스도인이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거나, 변명의 여지가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일단 그것이 죄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면, 그 세 가지 표현 모두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
목차 |
1장 서론 ………………………………………………………………5 2장 참 교회 ………………………………………………………… 13 3장 지역교회 ……………………………………………………… 19 4장 침례와 영접 …………………………………………………… 24 5장 신적인 이름-그리스도인 …………………………………27 6장 말씀사역 ………………………………………………………32 7장 목양의 책임 …………………………………………………… 35 8장 주의 만찬과 예배 ……………………………………………39 9장 치리와 징계…………………………………………………… 42 10장 카톨릭(Catholic) 교회라는 개념……………………………47 11장 카톨릭 교회의 발전 …………………………………………52 12장 로마 카톨릭 교회 ……………………………………………59 13장 희랍 카톨릭 교회(그리스 정교회)……………………… 65 14장 중세의 “교회” ………………………………………………68 15장 종교개혁과 루터교 ………………………………………… 72 16장 개혁교회와 장로교 …………………………………………77 17장 영국 성공회 …………………………………………………81 18장 청교도와 독립교회와 회중교회………………………… 85 19장 퀘이커교 혹은 동우회……………………………………… 88 20장 감리교…………………………………………………………92 21장 침례교회와 메노나이트 파…………………………………96 22장 오순절 교회 ………………………………………………… 103 23장 구세군…………………………………………………………107 24장 그리스도인의 모임(Christian Assemblies) ……………112 25장 교제권의 범위 ………………………………………………121 26장 “요긴한 진리”(Needed Truth)파 교회들………………… 130 27장 분파주의의 원인……………………………………………135 28장 열린 문……………………………………………………… 143 참고 문헌 ………………………………………………………… 155 |
약력 |
|
리뷰 |
|
상세설명 |
1장 서 론 “분파주의”(Sectarianism)는 죄입니다. 아주 심각한 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명백히 정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것을 마땅히 판단해야 할 만큼 판단하지 않습니다. 대다수 그리스도인이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거나, 변명의 여지가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일단 그것이 죄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면, 그 세 가지 표현 모두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분파주의는 기독교와 대립되는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성령 안에서 사랑과 희락과 평강”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롬 14:17). 분파주의는 지난 역사에 볼 수 있었던 증오와 슬픔과 분쟁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 신자들의 교제를 방해하거나 파괴해왔으며, 당연히 함께 조화를 이루며 동행했어야 하는 이들을 갈라놓았습니다. 그것이 책임져야 할 죄는 무수히 많으며, 그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에 끼친 불명예는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그것을 거부하고 정죄했어야 할 장본인들이 그것을 옹호했으며, 지금도 그것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이 분파주의의 죄(罪)만큼 보호받고 널리 선전되는 죄는 없습니다. 이 죄만큼 수많은 명목상의 교인들만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랑거리로 떠받쳐지는 죄는 없습니다. 이 죄만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참된 사랑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일에의 참된 동역을 파괴하는 데 더 책임 있는 죄는 없습니다. 이 죄만큼 구원받지 못한 이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데 방해가 되는 죄는 없습니다. 분파주의는 성령이 아닌 육신의 일이며, 그런 까닭에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대적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근절된 듯한 곳에서 다시 새롭게 돋아나는 악한 뿌리이며, 육신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성령에게는 그만큼 낯선 것입니다. 지금은 그것을 향해 전쟁을 선포할 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가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분파주의를 받아들이는 잘못을 쉽게 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분파주의의 과거 역사였습니다. 육신이 육신을 대적하여 싸웠으나 더욱 강한 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신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다스리도록 허락한다면 분파주의의 견고한 성도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모든 진정한 영적 부흥은 인간의 실패를 인정하고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는 데로 돌이킨 결과였습니다. 분파주의와 관련된 실패는 지금보다 더 증거가 많은 때는 없었으며, 회복의 길로 나가는 첫걸음은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고 자백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적부에 등록한 교인들은 이런 문제에 별반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들(골 1:6), 그 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었다는 성령의 증거가 있는 자들은(롬 8:16; 갈 3:26)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가 되어 교제와 증거에 있어서 나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뜻임을 이해할 것입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도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우리 주님의 기도만큼 신자의 마음에 친숙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아버지께 기도로 드려진 하나님 아들의 마음의 생각과 바램에 대한 계시보다 더 거룩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는 거룩한 말씀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은 현 시대의 분열된 기독교의 상태에 결코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요 17:21).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우리의 모든 행동과 태도가 이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그분의 마음의 생각 및 바램과 일치될 것을 요구합니다. 신약성경의 서신들에 이르면, 우리는 즉시, 1세기 그리스도인들 간에 분열이 존재했다는 슬픈 사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아울러 그 사실로 인해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그런 상태의 심각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명백히 새겨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파” (Sects)는 육신의 일로 묘사된 가증한 것들에 포함되었으며(갈 5:20), 또 고린도전서 초반은 분파주의의 악(惡)에 대해 많은 말을 합니다. 그 부분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사도 바울의 충성스러운 수고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충성스럽게 복음을 전파했으며, 많은 소중한 영혼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왔습니다. 남녀노소와 유대인과 이방인과 죄에 찌든 사람과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회심의 기적을 체험하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침례를 받고 교회의 교제에 참여했으며, 고린도의 부패하고 죄악된 상황 속에서 지역교회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고귀한 이름으로 모였습니다. 이런 교회는 제 기능을 적절히 수행하는 한 그 처한 곳에서 크나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된 삶은 그 자체가 증거가 되었습니다. 죄악에 사로잡혀 살던 죄인들이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세상에게 또 하나의 메시지가 주어져야 했으며, 그 메시지가 제대로 선포되려면 관계된 모든 이들이 한 마음으로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성도들은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갈래로 분열되었습니다. 세상에 한 몸된 증거를 보여주는 대신 그들은 육신적인 견해와 기호를 따라 서로 다투고 파를 형성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증거가 심각히 훼손당했고 사도 바울의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올바른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행동의 죄악됨을 인식하지 못할 리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을 받아 고린도에 보내는 첫 번째 서신에서 분파주의의 가증한 죄를 지적하는 원리적인 가르침을 베풀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교파처럼 몸에서 분리되어 각기 다른 이름으로 모이는 무리들이 고린도에 있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됩니다. 상황은 아직 그런 상태까지 가지 않았지만, 육신적인 사람들과, 상황이 무르익으면 조만간 공공연한 분열로 나아갈 분당을 짓기 위해 어떤 이들의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성향 속에 그 악의 뿌리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분파의식을 만들어내는 자들의 세속성을 정죄하되 그 이름이 그런 식으로 사용되고 있는 개개인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그렇게 했다면, 분명 그가 관계된 사람들 개개인을 시샘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을 것입니다. 그 대신 그는 지혜롭게도 그 일을 그 자신과 그의 동역자인 아볼로와 게바에게로 돌렸는데, 이는 그 분열의 악을 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정죄하게 해주었습니다. 4장 6절에서, 그는 아무리 가치 있는 이름이든 사람의 이름을, 인간 지도자 주변에 모여들어 성도들 사이를 나눌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 자신과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어떤 이름이든 사람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조차도 어느 파의 이름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데 이는 그것이 어느 분파가 아니라 성도 전체에게 속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사용되는 여러 분파적인 명칭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바울 당시에 육신적인 것으로 비난받던 것이 이 20세기에는 영적인 것으로 환영받을 수 있을까요? 고린도 교회에는 즉각적이고도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할 여러 심각한 죄가 존재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그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서신에서 가장 먼저 다룬 것이 분파주의의 악입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분파주의의 죄가 고린도 성도들의 육신적인 상태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주었습니다. 그들은 육신적이었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를 그분의 모든 백성의 모임의 중심으로 바라보는 대신 인간 지도자를 좇고 그 주변에 모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참된 그리스도의 종들은 교회에게 주신 선물이며, 또 그런 자들로서 마땅히 존경받아야 하지만,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훌륭한 자질을 갖췄을지라도 그들은 서로 비교되거나 성도들 사이에 경쟁하는 무리의 지도자 자리에 놓여서는 안 된다고 그들에게 권면했습니다. 분파주의의 죄는 요한삼서에서 다시 예증되었습니다. 이 서신은 가이오라는 매우 인품이 뛰어나고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잘 알려진 형제에게 보내졌습니다. 가이오는 매우 비정상적인 모습이 존재하는 어느 지역교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는 디오드레베라는 자칭 형제가 있었는데, 불명예스럽게도 그는 형제들 가운데 으뜸 되기를 좋아했다고 성경에 영구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한 자리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디오드레베는 다른 형제들이 교회에서 합당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도 요한과 그 동료들조차도 단순히 그 교회를 방문하려 했다가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요한은 앞서 방문 의도를 편지로 써서 알렸으나 디오드레베는 요한 일행을 맞이할 뜻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그 주님의 종들을 영접하는데 호의적인 뜻을 보이자 디오드레베는 가차 없이 그들을 교회에서 내쫓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그 자신의 교회였습니다. 그는 교회를 자신이 다스리고자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기독교 역사에 종종 나타난 완고한 성직자상의 전형입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 간에 분열의 존재를 말해주는 표현의 첫 사용을 보게 됩니다. 요한은 더 이상 어느 곳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편지한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대신 그곳에 있는 신실한 형제에게 편지한다고 말하면서, 디오드레베를 좇는 자들을 가리켜 “저희”라고 했습니다. 디오드레베는 “너희 중”이 아니라 “저희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했습니다.” 이미 디오드레베를 좇는 무리가 있었으며, 그런 면에서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다음 경고가 성취된 것입니다.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행 20:30). 분파주의의 역사를 보면, 성경이 미리 경고했듯이, 그 악은 주로 인간 지도자를 좇고 인간의 이름을 사용한데 기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교회에 대한 참된 영적인 개념과 교회에 관한 영감된 가르침들을 포기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교회의 영적인 문제들에 대한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권위서인 성경의 증거가 제처지고 다른 인간적인 권위가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런 결과, 신자들의 영적인 생활과 그들의 세상에서의 간증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사도들의 글에 나타난 주님의 뜻에 관한 계시는 매우 완전하고도 알기 쉽습니다. 그 계시는 우리가 기독교 시대가 다할 때까지 붙잡고 순종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 원칙에서 떠난 후 다시 영적으로 회복되려면 반드시 하나님 말씀의 원리와 규범으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이어지는 장들에서 우리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주적인 교회와 지역교회의 중요한 특징과 역할과 실제 모습에 관해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사도시대에 존재했던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며, 그런 다음에, 온갖 유해한 악을 내포한 분파주의를 만들어낸, 사도들의 본으로부터 떠난 역사를 간략히 개괄하여 분파주의의 원인을 알아내고 그 처방책을 발견해내는 것입니다. |
유의하세요! 문의글 혹은 악의적인 비방글은 무통보 삭제됩니다. 나의 상품평쓰기
번호 | 제목 | 작성자 | 평점 | 작성일 |
---|---|---|---|---|
등록된 자료가 없습니다!! |
전도출판사 INFORMATION
JD전도출판사의 서비스를 바로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공지사항
계좌안내
고객센터